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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송시 100편-제11편] 대설주의보

2009. 1. 1. 22:02 | Posted by 랑세
 원문출처 : [애송시 100편-제11편] 대설주의보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1/15/2008011500041.html
정끝별·시인
입력 : 2008.01.15 00:37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1983년>

▲ 일러스트=권신아


눈은 어떻게 내리는가. 어디서 오는가. 어디로 사라지는가. 머언 곳에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내리는 김광균의 눈이 있는가 하면, 쌀랑쌀랑 푹푹 날리는 백석의 눈이 있다. 기침을 하자며 촉구하는 김수영의 살아있는 눈도 있고, 희다고만 할 수 없는 김춘수의 검은 눈도 있다. 괜, 찮, 타, 괜, 찮, 타, 내리는 서정주의 눈도 있고, 갑작스런 눈물처럼 내리는 기형도의 진눈깨비도 있다.

그리고 여기 '백색계엄령'처럼 내리는 최승호(54) 시인의 눈이 있다. 1980년대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념의 시대였고 폭압의 시대였다. 그는 '상황 판단'이라는 시에서 '굵직한/ 의무의/ 간섭의/ 통제의/ 밧줄에 끌려다니는 무거운 발걸음./ 기차가 언제 들어닥칠지 모르는/ 터널 속처럼 불안한 시대'라고 일컬었다. 그의 시는 선명하고 섬뜩하게 '그려진다'. '관(觀)'과 '찰(察)'을 시 정신의 두 기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와 현실을 '보면서 드러내고', 자본주의와 도시문명을 '살피면서 사유한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골짜기에 눈은, 굵게 힘차게 그치지 않을 듯 다투어 몰려온다. 눈보라의 군단이다. 도시와 거리에는 투석이 날리고 총성이 울렸으리라. 눈은 비명과 함성을 빨아들이고 침묵을 선포했으리라. 백색의 계엄령이다. 쉴 새 없이 내림으로써 은폐하는 백색의 폭력, 어떠한 색도 허용하지 않는 백색의 공포! 그 '백색의 감옥'에는 숯덩이처럼 까맣게 탄 '꺼칠한 굴뚝새'가 있고, 굴뚝새를 덮쳐버릴 듯 '눈보라 군단'이 몰려오고, 그 군단 뒤로는 '부리부리한 솔개'가 도사리고 있다. 분쟁과 투쟁, 공권력 투입, 계엄령으로 점철됐던 시대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골짜기에 굵은 눈발이 휘몰아칠 때 그 눈발을 향해 날아가는 굴뚝새가 있었던가. 덤벼드는 눈발에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췄던가. 꺼칠한 굴뚝새의 영혼아, 살아있다면 작지만 아름다운 네 노랫소리를 들려다오! 다시 날 수 있다면 짧지만 따뜻한 네 날개를 펼쳐 보여다오!


[애송시 100편 - 제10편] 사슴

2009. 1. 1. 22:01 | Posted by 랑세
 원문출처 : [애송시 100편 - 제10편] 사슴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1/14/2008011400078.html
문태준·시인
입력 : 2008.01.14 01:04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곤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

<1938년>
▲ 일러스트=잠산

노천명(1911~1957) 시인은 어릴 때 홍역을 앓아 사경을 헤매다 다시 소생했는데 이 때문에 이름을 '천명(天命)'으로 바꾸었다. 하늘로부터 다시 받은 목숨으로 천수(天壽)를 누리라는 뜻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평생 독신으로 살다 1957년 타계했다. 노천명 시인은 고독의 차가운 차일을 친 시인이었다. 실제로도 고독벽이 있었다. 시 '자화상'에서 자신의 풍모를 "몹시 차 보여서 좀체로 가까이 하기 어려워한다"라고 썼고, "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흔히는 혼자 삼켜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라고 썼다.

이 시는 한 마리의 사슴을 등장시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다. 시인은 사슴의 몸통과 다리를 배제한 채, 자화상을 그리는 화가처럼 사슴의 목 윗부분을 그려낸다. 관(뿔)을 쓴 '높은 족속'으로 스스로를 도도하고도 고고하게 표현하지만, 2연에서는 물리칠 수 없는 마음의 통증을 보여준다. 마음의 통증은 어디에서 연유할까. 노천명은 많은 시편에서 어릴 때의 평온했던 시간으로 귀소하려는 욕구를 드러낸다. "절편 같은 반달이 싸리문 우에 돋고", "삼밭 울바주엔 호박꽃이 화안한 마을"로 시인의 마음은 자주 이끌린다. 그 시간들은 화해와 무(無)갈등과 동화적인 세계이다. 그런 세계를 동경하는 화자와 현실 사이의 괴리가 마음의 결손을 유발한다. 그 괴리의 거리와 슬픔의 크기를 시인은 가냘프고 긴 사슴의 목에 빗대어 말하고 있다.

삶은 고독과 갈등의 경전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몸을 받을 때부터 고독의 의복을 입고 태어났다. 그러나 우리는 고독의 정면(正面)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고독의 시간이라야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를 만날 수 있고, 그때 참회와 기도가 생겨나게 되지만. 해서 모든 종교적인 시간은 고독의 시간이지만. 릴케의 표현처럼 "고독은 비와도 같은 것"이며, "(고독은)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같은 잠자리에서 함께 잠을 이루어야 할 때"처럼 흔하게 찾아오는 것. 너무나 마음 쓸 데가 많아서 도무지 고독할 시간조차 없다고 말하지 말자. 이 시를 애송하는 시간에라도 우리는 우리의 근원적인 고독의 시간을 살자. 나의 자화상을 솔직하게 들여다보자. 고립감이 자기애로 나아가더라도. 설혹 자기애에 빠져 나르키소스처럼 한 송이의 수선화로 피어나더라도.

남빛 치마와 흰 저고리를 즐겨 입었다는 노천명 시인은 한국시사에서 시적 대상을 시적 화자와 겹쳐 놓음으로써 현대 서정시의 동일성 시학을 선보인 최초의 여성 시인이었다.


원문출처 : [애송시 100편- 제9편] 한 잎의 여자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1/11/2008011100052.html
정끝별·시인
입력 : 2008.01.11 00:32 / 수정 : 2008.01.11 11:12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病身) 같은 여자, 시집(詩集) 같은 여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1978년>


 

▲ 일러스트=권신아

오규원(1941~2007) 시인은, 보통 사람이 호흡하는 산소의 20%밖에 호흡하지 못하는 '만성폐쇄성폐질환'을 앓다 작년 겨울에 타계했다. 임종 직전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라는 마지막 문장을 손가락으로 제자 손바닥에 써서 남겼다.

나는 이 시를 대학교 1학년 때의 여름, 한 남학생이 보낸 대학학보의 주소 띠지 속에서 처음 읽었다.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 여자에게 이 시를 옮겨 나르곤 했던가. 이 시는 시집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1978)에 실린 작품이다. 그러나 시집 '사랑의 감옥'(1991)에 3편의 연작시 중 1편으로 다시 실렸다.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 모자'라는 부제가 첨가되었고, 2연의 끝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와 3연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가 바뀌었다. 부제를 첨가하여 '여자'는 '언어'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는 것을,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를 뒤로 배치하여 여자나 언어 모두 소유할 수 없는 존재임을 강조하였다.

나무껍질을 벗겨 물에 담그면 물빛이 푸르스름해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물푸레, 이 시 덕분에 물푸레나무와 그 잎이 보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커다란 나무에 비해 여릿하고 포릇하고 정말 '쬐그만' 둥근 잎이었다. 천생 '여자'를 닮은, 이를테면 눈물 하면 떠오르는 글썽임이라든가, 슬픔 하면 떠오르는 비릿함이라든가. 병신 하면 떠오르는 어리숙함이라든가, 시집 하면 떠오르는 아련함이라든가….

그런 '여자'를 반복해 나열하면 할수록, 묘사하면 할수록 '여자'의 실체는 사라지고 '여자'는 신비의 옷을 입는다. 세상의 절반이 여자다. 물푸레나무에 달린 '쬐그만' 잎처럼 하고많은 여자와 '여자'라는 보통명사를 이토록 입에 척척 달라붙도록, 혀에 휘휘 휘감기도록 구체화시켜 놓고 있다니!

여자는 남자의 '여자'다. 남자의 엄마이고 누이이고 애인이고 아내이고 딸이다. 남자의 과거이고 미래이다. 남자의 부재이자 심연이고, 선물이자 폭력이다. 그러니 시작이고 끝이다. 그런 여자를 어찌 정의할 수 있으랴. 모두 가지지만 결코 가질 수 없는 그런 한 '여자'를 누가 가졌다 하는가.

[애송시 100편 - 제8편] 묵화

2009. 1. 1. 21:59 | Posted by 랑세
원문출처 : [애송시 100편 - 제8편] 묵화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1/10/2008011000088.html
문태준·시인
입력 : 2008.01.10 00:51

묵화(墨畵)    김 종 삼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1969>

▲ 일러스트=잠산

김종삼(1921~1984) 시인의 시는 짧다. 짧고 군살이 없다. 그의 시는 여백을 충분히 사용해 언어가 잔상을 갖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아주 담담하다. 언어를 우겨넣거나 막무가내로 끌고 다닌 흔적이 없다. 사물과 세계를 대면하되 사물과 세계의 목소리를 나직하게 들려준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물안개가 막 걷히는 새벽 못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작은 여울에 누군가가 정성스레 놓아 둔 몇 개의 징검돌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묵화(墨畵)'의 목소리도 자분자분하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막 돌아와 쌀 씻은 쌀뜨물을 먹고 있는 소를 보여준다. 그의 시선은 소의 목덜미에 가 있다. 하루 종일 써레나 쟁기를 끌었을, 멍에가 얹혀 있었을 그 목덜미를 보여준다. 목덜미에는 굳은살이 박였을 것이다. 그리곤 소의 목덜미와 할머니의 손을 교차시킨다. 할머니도 노동을 마치고 돌아와 소와 함께 날이 저무는 저녁을 맞고 있다. 할머니는 겹주름처럼 고랑이 나 있는 밭에 쪼그려 앉아 풀을 뽑고 돌을 캐내고 종일 호미질을 했을 것이다. 시인의 시선은 소와 할머니의 부은 발잔등으로 옮아간다. 부은 발잔등을 보여줄 뿐이지만, 우리는 소와 할머니의 하루가 얼마나 고단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이 눈여겨본 대목은 소와 할머니의 관계일 것이다. 소는 할머니를, 할머니는 소를 마주하고 있다. 이 둘 사이에 조용하고 평화롭고 안쓰러운 대화와 유대가 오가고 있다. 낮의 소란과 밤의 정적이 합수(合水)하는 성스러운 시간에 마치 삶이란 본래 비곤하고 외롭고 쓸쓸한 것이라는 듯 소와 할머니는 잠시 멈춰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하여 이 둘의 '서로 돌봄'은 훈훈하면서도 슬프다. (우리는 얼마나 이 '쓸쓸한 돌봄'을 자주 잊고 사는가) 이 시를 다 읽고 나면 우리는 얼굴 가득 흐뭇하게 피어나던 웃음이 천천히 묽어지는 감정의 변화를 겪게 된다. 본래 삶이란 웃음과 슬픔으로 꿰맨 두 겹의 옷감이라는 듯.

김종삼 시인은 등산모를 곧잘 썼고 파이프 담배를 자주 물었고 술을 좋아했고 고전음악을 즐겨 들었다. 그에게 삶은 '방대한 / 공해 속을 걷는' 일처럼 여겨졌다. 그는 '하늘나라 다가올 때마다 /맑은 물가 다가올 때마다 /라산스카 /나 지은 죄 많아 /죽어서도 /영혼이 /없으리'라며 인간의 원죄를, 불구의 영혼을 아프게 노래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는' 사람들과 세상을 좋아하고 동경했다. 그의 시는 말이 적었지만 정직했다. 언어의 낭비가 많고 외화(外華)에 골몰하는 시대를 살수록 언어를 지극히 아껴 쓴, 먹그림같이 실박하게 살다 간 김종삼 시인이 그립다.


원문출처 : [애송시 100편 - 제7편] 사평역(沙平驛)에서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1/08/2008010801463.html
정끝별·시인
입력 : 2008.01.08 23:59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1981년>

 

▲ 일러스트=권신아

조그만 간이역에 눈은 푹푹 내려 쌓이고, 푹푹 내려 쌓이는 눈 때문에 막차는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합실에서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고 있다. 부려둔 보따리나 꾸러미에 기대 누군가는 졸고, 누군가는 담배를 피우고, 누군가는 웅크린 채 쿨럭이기도 한다. 털모자에 잠바를 입은 사내는 간간이 난로에 톱밥을 던져 넣으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난로 위 주전자는 그렁그렁 끓는 소리를 내며 수증기를 내뿜고, 시계는 자정을 넘어서고….

시대적 아픔을 서정적으로 그려냈다고 평가되는 곽재구 시인의 데뷔작 '사평역에서'(1981)를 읽을 때마다 나는 울컥한다. 아름다우면서 서럽고, 힘들지만 따뜻했던 그때 그 시절의 풍경을 소중한 흑백사진처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에는 지난 시절의 희망과 절망이 눈보라로 흩날리고 있다, 모래처럼 톱밥처럼. 그 울컥함이 소설(임철우 '사평역에서'), 드라마(TV문학관 '사평역', '길 위의 날들'), 노래(김현성 '사평역에서')로 장르를 달리하며 독자들의 공감을 얻게 했으리라.

이십대에 쓴 시답게 감각과 묘사가 풋풋하다. 깜깜한 유리창에 쌓였다 녹는 눈송이들은 흰 보라 수수꽃(라일락꽃)빛이다. 사람들이 그믐처럼 졸고 있다는 표현은 절묘하다. 확 타올랐다 사그라지는 난로 속 불빛은 톱밥을 던져 넣는 청색의 손바닥과 대조를 이룬다. 간헐적으로 내뱉는 기침 소리는 '눈꽃의 화음'을 강조하고, 뿌옇게 피어올랐다 사라지는 담배 연기는 회억(回憶)처럼 떠올랐다 가라앉곤 한다.

한줌의 톱밥을 던지는 '나'는 무슨 사연을 간직한 걸까? 기다리는 막차는 올까? 모든 역들은 어디론가 흘러가기 위한 지나감이고 경계이다. 하여 모든 역들이 고향을 꿈꾸는 것이리라. 사평은 나주 근처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다. 그 사평에 사평역이 없다니, 그토록 울컥하게 했던 사평역이 어디에도 없다니, 그래서 더욱 우리를 울컥하게 하는 것이겠지만.


원문출처 : [애송시 100편 - 제6편] 서정주 '冬天(동천)'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1/08/2008010800032.html
문태준·시인
입력 : 2008.01.08 00:23 / 수정 : 2008.01.08 00:23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은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일러스트=잠산

겨울 밤하늘을 올려 본다. 얼음에 맨살이 달라붙듯 차갑고 이빨은 시리다. 문득 궁금해진다. 미당(未堂) 서정주 시인은 왜 한천(寒天)에 사랑의 일과 사랑의 언약과 사랑의 얼굴을 심어 두었을까. 손바닥으로 쓸어보아도 온기라고는 하나 없는 그곳에 왜 하필 사랑을 심어 두었을까. 매서운 새조차 '비끼어 가'는 사랑의 결기를 심어 두었을까.

생심(生心)에 대해 문득 생각해본다. 처음으로 마음이 생겨나는 순간을 생각해본다. 무구한 처음을, 손이 타지 않아서 때가 묻지 않은 처음을. 부패와 작파가 없는 처음을. 신성한 처음을. 미당이 한천을 염두에 둔 것은 처음의 사랑과 처음의 연민과 처음의 대비와 처음의 그 생심이 지속되기를 바랐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심어 놨'다고 한 까닭도 생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심는다는 것은 생육(生育)한다는 것 아닌가. 여리디 여린 것, 겨우 자리 잡은 것, 막 숨결을 얻은 것, 젖니 같은 것 이런 것이 말하자면 처음이요, 생양해야 할 것들 아닌가. 미당은 초승달이 점점 충만한 빛으로 나아가듯 처음의 사랑 또한 지속되고 원만해지기를 기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미당의 시에는 생명 없는 것을 생장시키는 독특한 영기(靈氣)가 서려 있다. 그는 시 '첫사랑의 詩'에서 '초등학교 3학년때 / 나는 열두살이었는데요. / 우리 이쁜 여선생님을 / 너무나 좋아해서요. / 손톱도 그분같이 늘 깨끗이 깎고, / 공부도 첫째를 노려서 하고, / 그러면서 산에가선 산돌을 줏어다가 / 국화밭에 놓아 두곤 / 날마다 물을 주어 길렀어요.'라고 하지 않았던가. 산돌을 주워 와서 물을 주어 길렀듯이 이 시에서도 미당은 '고은 눈썹'을 생장시키는 재기를 보여준다.

미당의 시에는 유계(幽界)가 있다. 그는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라며 황홀을 노래했지만 그는 우주의 생명을 수류(水流)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흘러가되 윤회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운행에서 그는 목숨 받은 이들의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노래했다. 목숨 없는 것에는 목숨의 숨결을 불어 넣었다. 미당의 시의 최심(最深)은 삶 너머의 이승 이전의 유계를 돌보는 시심에 있다. 이 광대한 요량으로 그는 현대시사에수많은 활구(活句)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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