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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오랫동안

몸을 건강하고 튼튼한 상태로

유지하려고 노력해왔다.

나는 몸을 잘 씻고 보살펴주고 쉬게 해주었다.

하지만 명상할 때

나는 몸이 '내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저 좌정한 뒤

완벽하게 관여하지 않는다.

나는 숲 속 사원의 선원장이지만

절과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다.

내면 깊이 들어갈 때

나는 할 일이 전혀 없다.

나는 내 몸이 아니고

과거도 미래도 아니다.

그냥 앉아서

모든 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내버려둘 뿐이다.

 

*

관여하지 않을 채

염오를 체험하다 보면

위라가, 곧 탐욕의 사라짐이 일어난다.

탐욕의 사라짐은 다시

우빠사마(고요함)로 이어진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상태로

모든 바깥세상이 사라지고

내면이 완벽하게 고요한

참된 마음의 평화를 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몸과 과거와 미래가 연결될 수 없다.

마음은 시간상으로도,

공간상으로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고요함은

모든 것이 희미해지게 하고

사라지게 해준다.

 

*

사물들은

움직임이나 동요가 있을 때만 존재한다.

감각은 사물이 움직일 때만

그것을 알아채기 때문이다.

감각이 뭔가를 알아차리려면

비교하고 대조해보아야 한다.

사물들이 정지해 있을 때는

그 통일성과 불변성 때문에

사물들은 사라지고 만다.

모든 바깥세상은 사라지고

절도 사라지고

소리도 사라지고

기억도 사라지고

과거와 미래와 생각도 사라지고

몸도 사라진다.

 

*

몸이 사라져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고요함을 체험할 때

그것을 선정 상태라고 한다.

바깥세상으로부터 분리되고

다섯 감각은 사라진다.

이것을 다섯 감각의 세계로부터

초연해지는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것은 초연함 이상이다.

그것은 완벽한 관여하지 않음이요,

바깥세상의 완벽한 종료다.

 

*

이제 당신은 사라짐의 의미,

사물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포기와 버림이

참으로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된다.

당신은 세상을 버리며

그것은 대단히 즐겁고 평온한 일이 된다.

여기서 나는 버린다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해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염오이므로

관여하지 않음은

세상을 이해하는 것을 통해

저절로 일어난다.

사물들은 사라지고

당신은 아름다운 평화와

마음의 고요함에 이른다.

 

*

당신이 일단

마음의 고요함을 맛보기 시작하면

그것은 대단한 중독성이 있어

자꾸 더 맛보고 싶어진다.

마음이 고요함을 탐닉하는 것은

당신을 납바나로 더 깊이 빠져들게

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좋은 일이다.

붓다는 깊은 명상에 대한 애착만이

깨달음의 단계로 인도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닙바나;열반,번뇌의 소멸. 완전한 행복 혹은 대자유.

산스크리스트 어로는 나르바나. 빠알리 어로는 닙바나.

 

*

놓아버림 중독은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즐거움이요, 기쁨이요, 수행자의 길이다.

그것은 수행자들을 자유롭게 해준다.

그것은 자꾸만 더 사라짐과 놓아버림으로

인도해주는 중독이다.

염오의 힘이 계속 강해지고

그 덕에 당신은 세상으로부토 더 멀어진다.

 

*

참된 수행자, 참된 승려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되는 것을 뜻한다.

세상에서 해방되고 세상이 사라지게 내버려두는

이 놀라운 사람들은 바로 이런 연유로 존재한다.

그들은 자기제들을, 자아를 사라지게 함으로써

매 시간을 행복하고 즐겁게 지낸다.

그들은 내면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데

그것은 그들이

자신을 내면으로 몰아가서가 아니라

자기네를 둘러싸고 있는 고통이

자기네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관여하지 않으며

그럴수록 현상과 존재들은

더 희미해져가다

결국 사라지고 만다.

 

*

염오는 마음이 밖으로 새는 것을 그치게 한다.

당신은 마음이 밖으로 샌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명상하고 있을 때

갑자기 생각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명상이 끝난 뒤에 할 일에 관한,

자신의 의무들에 관한,

자신이 풀려고 애쓰고 있는

어떤 문제의 답에 관한 생각들이,

이럴 때 마음은 그 중심에서 흘러나온다.

이렇게 흘러나오는 것을 아사비라고 한다.

 

*

어째서 마음이 흘러나올까.

마음이 세상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은 세상의 고통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그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다.

바깥세상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당신은

세상사가 당신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연구를 통해,

혹은 세상의 이런저런 일을 적절히 다루어

뭔가를 얻는 일이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하지만 당신이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은 사라지고

생각의 흐름은 그친다.

당신은

세상사가 당신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중요하다는 느낌은 사라진다.

바깥세상이 사라져 버리고 나면

과거와 미래와 생각도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당신의 명상이 시작된다.

 

*

당신이 바깥으로부터 해방되어야

비로소 명상이 이루어진다.

이때 중요한 것은

당신 자신이 명상을 이루어지게 하는

주체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흔히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로 호흡을 관찰하라고 가르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지혜를 사용하는 것이 더 좋다.

당신은 지혜를 통해

세상이 고통이라는 것을 안다.

그럴 때 세상에 관여하지 않고

염오의 자세를 갖추게 된다.

 

*

당신은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그렇게 되는 것은

일종의 자동적인 반응과 같다.

고통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관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당신이 늘 제자리로 돌아오는 바탕이 된다.

당신이 관여하지 않을수록 명상은 더 쉬워진다.

명상 그 자체가 충실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해방될 때

당신은 내면으로 들어가고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게 된다.

당신은 호흡을 관찰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호흡을 제대로 이해할 때는

호흡으로부터도 해방된다.

호흡을 다스리려 하거나

다른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 말라.

숨은 저절로 들어오고 나간다.

그럴 때 당신은

호흡이 자신의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호흡도 염오의 자세로 대하면

사라져 버린다.

 

*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호흡을 관찰하는 것은

몸 관찰의 일환으라고 한다.

호흡이 자신과 무관한 것임을 알아서

그것에 관여하지 않을 때

호흡은 물리적인 몸과

다섯 감각의 자투리가 되어 사라진다.

그때야말로

당신이 깊은 데로 들어가기 시작할 때다

마침내 몸과 다섯 감각이 사라졌으므로

명상이 깊어지면서

당신은 놀라운 시간을 맞이한다.

 

*

세상을 다스리려 하거나

세상에 머무르려 하지 않고

모든 걸 놓아버리고 고통에서 해방될 때

당신은 애초에 간절히 바랐던

평화와 행복을 얻는다.

어째서 사람들은 행복을 얻기 위해

세상과 싸우는 것일까.

어째서 그들은 행복과 동행하는 것만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래봤자 따분하거나

우울해지기만 할 뿐이다.

 

*

염오의 길만이

마음의 참된 행복으로 인도해준다.

당신의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것은

아주 많은 것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럴 때 비로소 당신은

애초에 그 모든 것이 고통이었음을

확연히 이해할 수 있다.

다섯 감각은 고통이요,

이 세상도 고통이다.

말과 생각도 고통이다.

절도 비()도, 공부도 고통이다.

음식도 고통이다.

당신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이 고통이다.

당신이 어떤 관여도 하지 않고

마라가 침범할 수 없는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갈 때

그곳에는 고통으로부터의

아름다운 자유가 존재한다.

마라; 불교 수행에 장애가 되는 일체의 것.

 

*

선정이라는 깊은 명상 상태로,

들어가는 길이 바로 이것이다.

당신이 생각과 세상과 몸으로부터 해방될 때

선정이 저절로 일어난다.

그것은 또 다른 자동적인 반응이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확연히 이해할 때

이런 반은이 일어난다.

선정(禪定);빠알리 어로 자나(jhana)

 

 

*

고통을 제대로 이해할 때

당신은 세상을 쓰레기더미로 볼 수 있다.

쓰레기같이 하찮은 것이어서

당신은 관여하지 않아도 된다.

관여하지 않을 때 그것은 사라진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세상을 사라지게 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그런 일은 선택이나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

'아, 나는 이 사람들, 이 까마귀들,

갈바닥의 이 개미들,

뼛골을 시리게 하는

이 추위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고 생각함으로써 이루지는 것도 아니다.

당신은 무엇인가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지 않아도 된다.

그런 것은 더 이상 자신의 소관이 아니다.

그런 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 때

모든 것은 저절로 멀어지고 사라진다.

소유물을 줄이거나 버리는 것이

더 깊은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당신은 물질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소유물들도 역시 버려야 한다.

해묵은 습관이나 원한,

당신이 완가하게 고수하고 있거나

애지중지하는 것들을

바라보는 낡은 방식들도 버려야 한다.

당신은 자신을 마모시키고

자신을 잡아가두거나

제한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

대다수 사람은 과거의 포로다.

그들은 과거를

자신의 자아나 에고로 보고 동일시 한다.

자신을 과거로 여기기 때문에

과거는 그들의 일이 된다.

그들은 과거에 집착하고

그래서 고통을 받는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그들은 과거를 놓아버릴 수 있다.

그 감방 문은 항상 열려 있어

당신은 아무 때나 걸어 나올 수 있다.

자신이 과거의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완전히 놓거나 버림으로써

저절로 사라지게 할 수 있다.

그럴 용기와 결단력을 갖고 있다면.

 

*

고통에 대한 앎을 활용해

과거에 매달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자신에게 물어보라.

그렇게 하는 것이 무슨 득이 있는지 살펴보라.

그렇게 하는 것은

고통이라는 것을 이해하라.

관여하지 말고

저절로 사라지도록 내벼려두어라.

자신의 과거는 더 이상 생각조차 하지 말라.

그런 것들이 고통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때

미련 없이 포기할 수 있다.

그런 이해가 깊어질수록

그것들은 더욱 힘을 잃는다.

결국 그것들은 더 이상

당신의 레퍼토리의 일부가 되지 않는다.

당신이 외부 세계를 주시하면

그 세계는 사라진다.

당신이 오두막에 앉아 있으면

온 세계가 사라진다.

당신은 이것이 바로

명상이 지향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명상은 존재나 현상이 힘을 잃고

사라지게 하는 비법이다.

명상은 공()을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이다.

 

*

제대로 명상하려 할 때

반드시 사라져야 할 것은 생각이다.

우선 당신은 생각이 뭔지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생각을 객관화해 참으로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아야 한다.

생각은 당신을 어디로 데려갈까.

당신은 생각이 당신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생각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할 때

당신은 의지로

그것을 통제하거나 다스리려 하지 않고

염오의 자세로 대할 것이다.

 

*

경전에 생각을

당신의 아름다운 마음의 목을 휘감고 있는

죽은 개의 몸뚱이에 비유한 대목이 나온다.

생각을 그렇게 볼 때

당신은 어째서 스스로

그런 짓을 하고 있는지 의아해 한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썩고 더럽고 악취가 나는

역겨운 개의 죽은 몸뚱이를 집어던져버리듯

생각을 내던져버릴 것이다.

당신이 생각을 바로 볼 때

그런 일이 일어난다.

당신은 생각이 당신의 일이 아님을

알게 되고 물리쳐버린다.

그리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바깥세상이 아니라 마음을 향해.

 

*

세상사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고요한 중심인 마음으로

희향하는 것으로도 볼 수가 있다.

이따금 당신은 고향 세계, 친구들의 세계,

심지어 불교의 세계도

당신을 당신의 중심으로부터 끌어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그렇게 잡아당기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바깥세상들은 평생토록

당신을 그런 식으로 끌어당겨 왔다.

그러한 끌어당김은

당신에게 어떤 결과를 안겨주었을까.

*

수행자들이 절을 떠나는 것

대개 이성(異性) 때문이다.

그들이 절을 떠나 과연 행복해질까.

오래전 <펀치>라는 잡지에 수록된

특집기사의 제목은

'결혼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조언'이었다.

그런데 그 기사의 한가운데 두 페이지는

"DOON'T(하지마)"라는 네 글자를 빼고는

텅 비어 있었다.

그 기사를 쓴 이들은

결혼의 고통을 이해하고 있었다.

*

당신은 다르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은 특별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지혜롭기 때문에

결혼의 고통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 더 나은 사람이라서

다른 모든 사람이 직면하는 어려움과 문제를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에고의 오만일 뿐이다.

*

나는 젊었을 때는 많은 환상에 빠져들었다.

나는 그런 환상들을

논리적인 귀결점까지 끝끝내 추적해

그것들이 나를 더 이상 사로잡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지?'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지?'

전체적인 그림이 떠오를 때까지

계속 추적해 들어갔다.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고

인생의 석양을 향해 나아가는

환상들을 떠올리면서

"그 다음에는?"이라고 계속 캐묻자

모든 즐거운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 다음에 오는 것들은 공허하기만 했다.

그 다음에 오는 것들은

다른 모든 사람이 겪는 것과

똑같을 터이므로

거기에는 어떤 화사한 색깔도, 광채도,

기쁨도, 행복도 없었다.

*

즐거운 부분들이 이울어 사라지고 나면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삶에 관한 어떤 지혜도 체득하지 못한다.

그저 즐겁고 행복한 몇 순간을 맛보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이기며

허덕허덕 살아가려고 애쓸 뿐이다.

그러다 눈 깜박할 사이에 늙어

결국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진다.

그런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염오의 길을 따르면

당신은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당신은 이미 많은 고통을 겪었을 테니

고통을 탐구하기에 충분한 자료를

갖추고 있을 것이다.

당신에게 어려움이 닥쳐올 때는

그 고통을 깊이 들여다보고

염오의 자세를 갖추도록 하라.

*

안거에 든 동안 간간이

지루한 기분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다리가 저리고 아플 경우,

명상하거나 걷거나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고

그저 지루하기만 한데

달리 뾰족하게 할 것이 없이

그냥 멍하니 앉아 있을 경우에는

지루함을 잘 살펴보고 조사해보라.

*

고통을 잘 살펴볼 때는

그 모든 순간이

자신의 성숙과 훈련을 위해 활용할

좋은 명상의 시간이 되어준다.

마음훈련은

사물과 현상을 통제하려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갖은 어려움과 실망스러운 일을

당신에게 진리를 가르쳐주기 위해 오는

진리의 사자(使者)들로 여겨라.

아잔 차는 그런 것들을

끄루바 아잔, 곧 '큰 스승'이라 불렀다.

*

큰 스승은 태국의 어느 큰 절에

살고 있지 않다.

그런 이는 허구적인 큰 스승이다.

참된 스승은

당신이 아침에 눈을 뜨긴 떴는데

너무 피곤해 도무지 잠자리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을 때

당신의 오두막 안에 계실 것이다.

그런 큰 스승은

당신이 오랜 기간 명상을 하는데도

아무 진전이 없을 때 그곳에 계실 것이다.

참된 큰 스승은

당신이 명상할 날이 얼마나 남았나

헤아리고 있을 때 그곳에 계실 것이다.

누군가가 당신의 밥그릇에

형편없는 음식을 담아줄 때

당신이 막 깊은 명상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하필이면 까마귀가 요란하게 울어댈 때

혹은 당신에게 큰 실망과 환멸감을

안겨주는 일들이 일어날 때가

바로 스승이다.

그런 것들은 주시하고 귀담아듣고

꿰뚫어보고 이해해야 할 것들이다.

*

당신이 이제까지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쓴 경우를 꼽아본다면

얼마나 될까.

무수히 많지 않았을까.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심초사하는 것은

이승을 뜰 때까지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여러 생애 걸쳐서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지 말고 이 세상이라는 것은

단지 감각들이 빚어낸 것에 불과함을 알아차려야 한다.

*

이 세상은 오온이 빚어낸 것이다.

그것은 당신과 아무 상관도 없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세상이라고 부르는 세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름이 사람이고 세상일 뿐이다.

오온(五蘊);인간을 구성하는 정신과 물질의 다섯 요소.

곧 몸(), 느낌(), 인식(), 의지(), 의식()

*

우리 절에서는 가끔

코카투 앵무새가 떼로 몰려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들은 아주 시끄럽게 떠들어댄다.

어떤 사람들은

코카투가 떠드는 소리가 싫다고 한다.

하지만 당신이 그 소리를 싫어하든 말든

그것들은 여전히 시끄럽게 떠들어댈 것이다.

그러니 어째서 놓아버리지 않는가.

*

명상하면서 나는 나에게 묻곤 한다.

"어째서 소음은 나를 어지럽게 만들까?"

밖에서 나는 새소리든 누군가가 기침하든,

넓은 홀 문이 꽝 하고 닫히든

어째서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까.

어째서 나는 눈꺼플을 닫아버리듯

보이지 않는 마개를 찾아내

두 귀를 닫아버릴 수 없는 것일까.

*

소리를 잘 살펴서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이해하고 나자

내가 소리를 들은 단 하나의 이유는

내 마음이 그리로 향해 귀담아들었기

때문임이 분명해졌다.

소리의 세계에 대한

나의 적극적인 관여가 있었던 것이다.

소리가 나를 어지럽게 만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

아잔 차는

소리가 너희를 어지럽게 만드는 게 아니라

너희가 소리를 어지럽게 만든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내 마음에 깊은 울림을 전해주는

아주 심오한 말씀이었다.

나는 그 말씀 덕에 소리의 본성과 소리가

내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아잔 차( Ajahn Chah, 1918~1992); 20세기 태국 상좌부 불료 스님 중 가장 위대한 명상 스승으로 꼽히며, 아잔 브람과 아잔 수메도 같은 서구 출신 제자를 여럿 지도하기도 했다.

*

누군가 당신을 돼지나 천치라고 부를 때

그 소리를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런 소리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 소리를 귀담아듣는다.

우리는 소리의 세계에 관여하고

그것에 집착한다.

소리가 그 본성에 따라 나오는 것에

불과함을 깨달을 때

우리는 염오의 자세를 갖게 된다.

소리에는 아주 듣기 좋은 소리도 있고

미친 소리도 있고 새 소리도 있다.

어뗜 새들은 감미로운 소리를 내고

까마귀 같은 새들은 흉측한 소리를 낸다.

까마귀가 그런 소리를 내는 것은

까마귀 탓이 아니다.

제 속성에 따라 그런 소리를 낼 뿐이다.

*

젤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재가 수행다들은 까마귀 같고

어떤 재가 수행자들은 나이팅게일 같다.

어떤 승려들은 말을 예쁘게 하고,

어떤 승려들은 흉측하게 한다.

그런 소리들은

각자의 속성에서 나올 뿐이다.

그런 소리들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

*

우리가 염오를 통해

그런 소리들에 관여하지 않을 때

그것들은 사라져 버린다.

고통의 원인이 소멸될 때

고통은 사라져 버린다.

감각의 세계는

다른 것으로 바꾸려는 마음이 전혀 없으면

저절로 사라지기 시작한다.

우리가 염오하는 마음과 함께

그것에 관여하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에게 퇴짜를 놓을 것이고

우리도 그것을 무시하게 된다.

염오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데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더불어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

<초전볍륜경>에서는

고통의 성스러운 진리를

철저히 이해하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고통을 극복하려 하거나

변화시키려 하거나

더 나은 것으로 만들려 하거나

도피하려 하지 말고

이해해야 한다.

*

힘겨운 때야말고

늘 달아나는 식의

쉬운 방관을 택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고통과 직면하고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기에

더 없이 좋은 기회다.

*

사람들은 고통이나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나름의 탈출구를 갖고 있다.

환상 속에 빠져 지내기, 영화보기,

인터넷 서핑, 책 읽기, 친구들과 수다 떨기,

차나 커피 마시기, 무작정 걷기 등.

그럴 때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빠져나오려 하는 것일까.

우리는 무엇을 얻기 위해

그런 환상들에 빠져드는 것일까.

상황이 별로 좋지 않거나

만족스럽지 않다는 문제에 대한

우리의 습관적인 반응은 이런 식으로 나온다.

*

봇다는 우리가 일상에서

어딘가로 간절히 가고 싶어할 때,

절 같은 데로 가고 싶어할 때,

혹은 지혜롭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할 때,

우리가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

고통을 참구하다 보면

우리 모두가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깨달은 여승들의 게송 모음長老尼偈 >에는

유명한 끼사고따미 비구니(여승)의

이야기가 나온다.

끔찍하게 사랑했던 어린 아들을 잃고

비탄에 빠진 끼사고따미를

사람들이 도우려 할 때

붓다가 택한 전략은

다른 사람들도 역시 죽는다는

자명한 사실을

그녀에게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아들의 죽음은

우주에서 단 하나뿐인 사건이 아니라

다른 모든 죽음과

밀밀히 연관된 사건이라는 사실을

붓다는

끼사고까미가 죽음이라는 고통을

이해하기를 바랐다.

*

죽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존재 구조의 일부다.

죽음은 도처에 가득 차 있다.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

그래서 붓다는 끼사고까미에게

아들을 되살려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말고

그 문제의 보편성을

이해하라고 가르쳤다.

*

우리는 실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반길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상이 이러하니 그냥 놓아버리라고?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반응이 아니다.

*

우리가 고통의 문제,

우리가 처한 현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제대로 이해할 때 나올 수 있는

단 하나의 자연스러운 반응은

무엇이 오든 피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염오다.

*

염오는 관여하지 않음을 뜻한다.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을

외면해 버려야 한다.

현상을 변화시키려 하는 것은

우리를 삶 속에 더 깊이

휘말려들게 할 뿐이다.

현상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삶 속에 휩쓸려들게 할 뿐이다.

*

관여하지 않는 것이 올바를 반응이다.

관여하지 않음은

존재나 현상을 가만 내버려두고

그것들에 관심을 갖지도 않고

염려하지도 않음을 뜻한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있을 뿐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것에

관여하지 않는다.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것에

관여하지 않을 때

우리는 삶으로부터 물러선다.

그것은 삶을 거부하는 것과 거의 비슷하다.

존재와 현상을 사라지게 만드는

일종의 거부나 무시 같은 것.

*

붓다는 안타가운 마음에서

사람들을 해산시키거나

물러가게 하는 법을 터득했다.

*

가끔 사람들은 딱히 더 좋은 할 일이 없어

다른 이들과의 이야기 속에 빠져들곤 한다.

나는 빈둥거리고 지내는 것을,

특히 안거(수행자들의 은둔수행기간)에 들었을 때

여러 시간 질문에 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는

담마(Dhamma.붓다의 가르침. 진리)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다.

그런 답은 생각을 자꾸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고요히 앉아 생각하기를 그치는 데서 나온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내게 질문을 던지면

나는 가급적 간략하게 답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수다 떠는 일에

빠져들지 않도록 한다.

*우리는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사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어째서 그런 온갖 잡사에 관여하는가.

그것들을 바로 보라.

그것들이 당신에게 고통을 안겨주기만

할 뿐임을 깨달으라.

그것들은 당신을

피곤하고 산란하게 만들 뿐이다.

염오의 자세로 볼 때

이 모든 지각 대상은 하찮은 것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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