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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고 싶으면 명상으로 마음의 눈을 떠라

글 윤종모 주교 | 편집 홍헌표 기자 2019-07-03

 

자아초월 심리학자인 켄 윌버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3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 번째의 눈은 육체의 눈(eye of flesh)이요, 두 번째의 눈은 마음의 눈(eye of mind)이며, 세 번째의 눈은 정관의 눈(eye of contemplation)이라는 것이다.

 

 

육체의 눈은 우리가 사물을 보고 사물을 인지하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신체의 눈을 말하며, 마음의 눈은 사물의 외형 너머 의미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이며, 정관의 눈은 좀 더 깊은 차원의 영성의 눈으로 세상을 관조할 수 있는 눈이다.

 

나는 상담이나 명상, 혹은 정신건강 등을 강의할 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정관의 눈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마음의 눈은 가지고 살아가라고 강조하곤 한다. 왜냐하면 마음의 눈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좀 더 행복하고 좀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지수는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편이다. 왜 그럴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혹은 성취할 수 있는 것에 비해 욕망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 규모에 비해 행복지수가 낮은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그냥 우리가 가난하고 못 살기 때문에 행복지수가 낮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행복에 대한 외부적 요소, 예를 들어 돈, 명예, 권력 등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있고, 빼앗길 수도 있다. 행복에 대한 좀 더 안전하고 완벽한 요소는 마음 속에 있다.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 점을 일찍이 간파하고 “행복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마음속에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 외에 수많은 현자들이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마음의 눈을 뜨면 이 사실이 보인다. 마음의 눈을 뜨면 삶과 더불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른 각도에서 새롭게 보는 지혜가 생긴다.

행복하려면 욕망을 줄이든지, 아니면 그 욕망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키우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세상사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마음 훈련을 해야 한다. 사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긍정적인 마음의 훈련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같은 직장에서 같은 일을 하며 같은 보수를 받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한 사람은 일은 많고 보수는 적어서 힘들어 못해 먹겠다고 늘 불평을 늘어놓곤 한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일이 많아도 그 일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으며 보수가 적긴 하지만 아껴 쓰면 견딜만 하다고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누가 더 행복할까?

 

말할 것도 없이 후자가 더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후자가 진급도 더 빠르고 삶을 더 성공적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인생 각본을 가지고 살고 있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 각본을 가지고 살고 있고, 불행한 사람은 불행 각본을 가지고 살고 있다. 위에서 말한 두 사람 중에 전자는 불행 각본을 가지고 살고 있는 사람이며, 후자는 행복 각본을 가지고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마음의 눈을 뜨면 행복 각본과 불행 각본의 본질이 보이고, 자신이 어떤 인생 각본을 가지고 있는지 보인다. 미국의 상담 심리학자인 하워드 클라인벨은 마음의 눈을 ‘새로운 의식의 창’이라고 표현한다.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 그러면 삶에 여유가 생기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긍정적인 면을 발견하고,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형성하며 삶이 풍요롭고 행복해진다.

 

마음의 눈을 뜨게 하는 가장 좋은 도구는 명상이다. 행복하고 싶은가? 그러면 마음의 눈을 뜨라. 마음의 눈을 뜨고 싶은가? 그러면 명상하라.

 

윤종모 주교의 명상 칼럼(http://mindgil.chosun.com/client/board/view.asp?fcd=F1021&nNewsNumb=20190668136&nCate=C01&nCateM=M1002)

 

*

나는 오랫동안

몸을 건강하고 튼튼한 상태로

유지하려고 노력해왔다.

나는 몸을 잘 씻고 보살펴주고 쉬게 해주었다.

하지만 명상할 때

나는 몸이 '내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저 좌정한 뒤

완벽하게 관여하지 않는다.

나는 숲 속 사원의 선원장이지만

절과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다.

내면 깊이 들어갈 때

나는 할 일이 전혀 없다.

나는 내 몸이 아니고

과거도 미래도 아니다.

그냥 앉아서

모든 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내버려둘 뿐이다.

 

*

관여하지 않을 채

염오를 체험하다 보면

위라가, 곧 탐욕의 사라짐이 일어난다.

탐욕의 사라짐은 다시

우빠사마(고요함)로 이어진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상태로

모든 바깥세상이 사라지고

내면이 완벽하게 고요한

참된 마음의 평화를 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몸과 과거와 미래가 연결될 수 없다.

마음은 시간상으로도,

공간상으로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고요함은

모든 것이 희미해지게 하고

사라지게 해준다.

 

*

사물들은

움직임이나 동요가 있을 때만 존재한다.

감각은 사물이 움직일 때만

그것을 알아채기 때문이다.

감각이 뭔가를 알아차리려면

비교하고 대조해보아야 한다.

사물들이 정지해 있을 때는

그 통일성과 불변성 때문에

사물들은 사라지고 만다.

모든 바깥세상은 사라지고

절도 사라지고

소리도 사라지고

기억도 사라지고

과거와 미래와 생각도 사라지고

몸도 사라진다.

 

*

몸이 사라져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고요함을 체험할 때

그것을 선정 상태라고 한다.

바깥세상으로부터 분리되고

다섯 감각은 사라진다.

이것을 다섯 감각의 세계로부터

초연해지는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것은 초연함 이상이다.

그것은 완벽한 관여하지 않음이요,

바깥세상의 완벽한 종료다.

 

*

이제 당신은 사라짐의 의미,

사물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포기와 버림이

참으로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된다.

당신은 세상을 버리며

그것은 대단히 즐겁고 평온한 일이 된다.

여기서 나는 버린다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해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염오이므로

관여하지 않음은

세상을 이해하는 것을 통해

저절로 일어난다.

사물들은 사라지고

당신은 아름다운 평화와

마음의 고요함에 이른다.

 

*

당신이 일단

마음의 고요함을 맛보기 시작하면

그것은 대단한 중독성이 있어

자꾸 더 맛보고 싶어진다.

마음이 고요함을 탐닉하는 것은

당신을 납바나로 더 깊이 빠져들게

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좋은 일이다.

붓다는 깊은 명상에 대한 애착만이

깨달음의 단계로 인도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닙바나;열반,번뇌의 소멸. 완전한 행복 혹은 대자유.

산스크리스트 어로는 나르바나. 빠알리 어로는 닙바나.

 

*

놓아버림 중독은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즐거움이요, 기쁨이요, 수행자의 길이다.

그것은 수행자들을 자유롭게 해준다.

그것은 자꾸만 더 사라짐과 놓아버림으로

인도해주는 중독이다.

염오의 힘이 계속 강해지고

그 덕에 당신은 세상으로부토 더 멀어진다.

 

*

참된 수행자, 참된 승려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되는 것을 뜻한다.

세상에서 해방되고 세상이 사라지게 내버려두는

이 놀라운 사람들은 바로 이런 연유로 존재한다.

그들은 자기제들을, 자아를 사라지게 함으로써

매 시간을 행복하고 즐겁게 지낸다.

그들은 내면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데

그것은 그들이

자신을 내면으로 몰아가서가 아니라

자기네를 둘러싸고 있는 고통이

자기네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관여하지 않으며

그럴수록 현상과 존재들은

더 희미해져가다

결국 사라지고 만다.

 

*

염오는 마음이 밖으로 새는 것을 그치게 한다.

당신은 마음이 밖으로 샌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명상하고 있을 때

갑자기 생각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명상이 끝난 뒤에 할 일에 관한,

자신의 의무들에 관한,

자신이 풀려고 애쓰고 있는

어떤 문제의 답에 관한 생각들이,

이럴 때 마음은 그 중심에서 흘러나온다.

이렇게 흘러나오는 것을 아사비라고 한다.

 

*

어째서 마음이 흘러나올까.

마음이 세상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은 세상의 고통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그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다.

바깥세상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당신은

세상사가 당신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연구를 통해,

혹은 세상의 이런저런 일을 적절히 다루어

뭔가를 얻는 일이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하지만 당신이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은 사라지고

생각의 흐름은 그친다.

당신은

세상사가 당신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중요하다는 느낌은 사라진다.

바깥세상이 사라져 버리고 나면

과거와 미래와 생각도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당신의 명상이 시작된다.

 

*

당신이 바깥으로부터 해방되어야

비로소 명상이 이루어진다.

이때 중요한 것은

당신 자신이 명상을 이루어지게 하는

주체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흔히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로 호흡을 관찰하라고 가르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지혜를 사용하는 것이 더 좋다.

당신은 지혜를 통해

세상이 고통이라는 것을 안다.

그럴 때 세상에 관여하지 않고

염오의 자세를 갖추게 된다.

 

*

당신은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그렇게 되는 것은

일종의 자동적인 반응과 같다.

고통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관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당신이 늘 제자리로 돌아오는 바탕이 된다.

당신이 관여하지 않을수록 명상은 더 쉬워진다.

명상 그 자체가 충실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해방될 때

당신은 내면으로 들어가고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게 된다.

당신은 호흡을 관찰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호흡을 제대로 이해할 때는

호흡으로부터도 해방된다.

호흡을 다스리려 하거나

다른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 말라.

숨은 저절로 들어오고 나간다.

그럴 때 당신은

호흡이 자신의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호흡도 염오의 자세로 대하면

사라져 버린다.

 

*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호흡을 관찰하는 것은

몸 관찰의 일환으라고 한다.

호흡이 자신과 무관한 것임을 알아서

그것에 관여하지 않을 때

호흡은 물리적인 몸과

다섯 감각의 자투리가 되어 사라진다.

그때야말로

당신이 깊은 데로 들어가기 시작할 때다

마침내 몸과 다섯 감각이 사라졌으므로

명상이 깊어지면서

당신은 놀라운 시간을 맞이한다.

 

*

세상을 다스리려 하거나

세상에 머무르려 하지 않고

모든 걸 놓아버리고 고통에서 해방될 때

당신은 애초에 간절히 바랐던

평화와 행복을 얻는다.

어째서 사람들은 행복을 얻기 위해

세상과 싸우는 것일까.

어째서 그들은 행복과 동행하는 것만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래봤자 따분하거나

우울해지기만 할 뿐이다.

 

*

염오의 길만이

마음의 참된 행복으로 인도해준다.

당신의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것은

아주 많은 것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럴 때 비로소 당신은

애초에 그 모든 것이 고통이었음을

확연히 이해할 수 있다.

다섯 감각은 고통이요,

이 세상도 고통이다.

말과 생각도 고통이다.

절도 비()도, 공부도 고통이다.

음식도 고통이다.

당신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이 고통이다.

당신이 어떤 관여도 하지 않고

마라가 침범할 수 없는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갈 때

그곳에는 고통으로부터의

아름다운 자유가 존재한다.

마라; 불교 수행에 장애가 되는 일체의 것.

 

*

선정이라는 깊은 명상 상태로,

들어가는 길이 바로 이것이다.

당신이 생각과 세상과 몸으로부터 해방될 때

선정이 저절로 일어난다.

그것은 또 다른 자동적인 반응이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확연히 이해할 때

이런 반은이 일어난다.

선정(禪定);빠알리 어로 자나(jha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