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윤재근 저 莊子>
<소요유>의 어록
물이 괸 곳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만한 힘이 없다. 한 잔의 물을 마루의 패인 곳에 엎지르면 풀잎은 떠서 배가 되지만 거기에 잔을 놓으면 마루바닥에 닿는다. 물은 얕은데 배가 크기 때문이다
(夫水之積也不厚 則負大舟也無力 覆杯水於拗堂之上 則芥爲之舟 置杯焉則膠 水淺而舟大也)
사람은 앉을 자리를 보고 발을 뻗을 줄 알아야 하고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을 줄 알아야 한다.
사람만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만물이 다 그렇게 하면 어긋남이 없어질 것이 분명하다.
물은 얕은데 배가 크다면 그것은 어긋난 것이다.
얕은 물에는 풀잎이 배 구실을 하지만 큰 배가 뜨자면 깊은 물이 있어야 한다.
이처럼 큰 것과 작은 것은 서로 제 나름의 관계를 간직한다.
이러한 관계를 아는 일이 무엇보다 귀중하다.
앎에도 크나큰 앎이 있고 작은 앎이 있다.
하나를 알고 둘을 모르면 그 역시 하나를 아는 탓으로 일이 저질러지고 만다.
큰 앎이란 부족함이 없는 것이며 크고 작은 것을 아는 앎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큰 것을 큰 것으로 알려 하지 않고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얕은 물에다 배를 띄워 놓고 뜨지 않는다고 한탄을 한다.
얕은 물에서 배가 어떻게 뜰 수 있을 것인가는 생각하지 않고 한사코 배를 띄워야 한다고 욕심을 고집한다.
이러한 짓은 모두 어리석은 인간의 탈이다.
인간은 아주 작은 존재에 불과한데도 하늘보다 더 크고 땅보다 더 크다고 우겨댄댜.
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다.
사람이 어러석으니 그 삶도 어리석고 그 삶이 어리석으니 삶마다 답답하고 조여들 뿐이다.
옹색한 자리에서 발을 뻗으려고 하면 할 수록 발만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온 몸이 아프고 괴롭게 되어 버린다.
이러한 수고는 분명 얕은 물에다 배를 띄우려는 욕심에 불과하다.
이 얼마나 허망한 욕심의 덩어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