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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출처 : [애송시 100편 - 제 84편]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문태준·시인
 원문링크 : http://issue.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16/2008041600377.html
문태준·시인
입력 : 2008.04.15 22:56 / 수정 : 2008.04.15 23:00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 일러스트=잠산
이 시는 4·19세대의 좌절과 절망을 노래한 4·19세대의 만가(輓歌)이다. 김광규(67) 시인은 한글로 교육을 받은 첫 세대로 4·19가 일어난 1960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이 시를 4·19혁명 18년 뒤에 썼다. 중남미 보컬그룹이 불러 1960년대 초반 크게 유행했던 노래와 동명의 제목이다.

터놓고 말하는 이 시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변해버린 세상과 변해버린 사람들의 살풍경, 온데간데없는 열망과 초심(初心), 터럭만큼의 부끄러움조차 없게 된 양심, 판치는 속물주의와 물질주의. 이것을 시인은 부지불식간에 빠져들게 된 깊숙한 '늪'이라고 부른다. 크게 호통을 치지 않는데도 이 시를 읽고 나면 뭉근하게 가슴이 저민다. 왜 그런가.

우리는 점점 어깨가 움츠러들고 왜소화되어 간다. "작아진다/ 자꾸만 작아진다/(…)/ 모두가 장사를 해 돈 벌 생각을 하며 작아지고/ 들리지 않는 명령에 귀 기울이며 작아지고/ 제복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작아지고/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며 작아지고/ 수많은 모임을 갖고 박수를 치며 작아지고/ 권력의 점심을 얻어먹고 이를 쑤시며 작아지고/ 배가 나와 열심히 골프를 치며 작아지고/ 칵테일 파티에 가서 양주를 마시며 작아지고/ 이제는 너무 커진 아내를 안으며 작아진다"(〈작은 사내들〉) 시인은 어느덧 소시민이 되어버린 우리에게 입장 없음과 순순히 따름이 정녕 우리들이 고대한 초상이었느냐며 정직한 질문을 던진다. 면구스럽다.

독문학자이기도 한 김광규 시인은 일상시(日常詩)의 영역을 새롭게 개척한 시인이다. "김광규의 시는 그 생각에 비뚤어짐이 없으며 그 어조에 격렬한 부르짖음이 없으며 그 은유에 현란한 모호성이 없고 그 관심이 소박한 일상을 넘어서지 아니한다."(문학평론가 이남호)

김광규 시인 스스로도 자신의 시는 오페라에 있어서의 레치타티보(서창)쯤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의 시는 아리아처럼 목청을 높여 외치지는 않는다. 다만 낮게 중얼중얼거릴 뿐. 하지만 이 중얼거림은 살기 바쁜, 살기 위해서 살아가는, 배불리 먹는 일에 열중인 우리들을 거북하게 만든다. 마치 맨발로 사금파리를 밟은 듯하게. 일례로, 그는 우리를 '4월의 가로수'에 섬뜩하게 빗댄다. 우리의 모습이 "팔다리까지 잘려/ 봄바람 불어도 움직일 수 없고/ 토르소처럼 몸통만 남아"(〈4월의 가로수〉) 있는 수양버들이라니! 그러나 둘러댈 말이 없다.

4·19혁명 기념일이 다가오면 이 시를 다시 읽게 된다. 까슬까슬하게 카랑카랑하게 살자고 다짐하면서.

 원문출처 : [애송시 100편 - 제 83편] 솟구쳐 오르기 2 김승희 정끝별·시인
 원문링크 : http://issue.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15/2008041500312.html
정끝별·시인
입력 : 2008.04.14 23:08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날게 하지 않으면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솟구쳐 오르게 하지 않으면



파란 싹이 검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나

무섭도록 붉은 황토밭 속에서 파아란 보리가

씩씩하게 솟아올라 봄바람에 출렁출렁 흔들리는 것이나

힘없는 개구리가 바위 밑에서

자그만 폭약처럼 튀어나가는 것이나

빨간 넝쿨장미가 아파아파 가시를 딛고

불타는 듯이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나




민들레가 엉엉 울며 시멘트 조각을 밀어내는

것이나

검은 나뭇가지 어느새 봄이 와

그렁그렁 눈물 같은 녹색의 바다를 일으키는 것이나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삶은 무게에 짓뭉그러진 나비알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존재는

무서운 사과 한 알의 원죄의 감금일 뿐

죄와 벌의 화농일 뿐

▲ 일러스트=권신아
김승희(56) 시인의 시를 읽노라면 '시는 상처의 꽃'이라는 말이 입에 돈다. 상처에서 피처럼 피어나는 꽃, 그것이 시라는 생각에 미친다. 우리는 가족·사랑·출산·질병·밥벌이·이념·사회를 떠나 살 수 없기에, 우리들 상처는 우리들 보금자리에서 생긴다. 매일매일이 상처투성이다. 상처로부터 솟구쳐 오르게 하는 '용수철'이 없다면 우리는 상처로 짓뭉그러져 있을 것이다. 우리 몸에 내장된 '상처의 용수철'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삶은 상처의 화농에 파묻혀 있을 것이다. 튕겨 오르는 힘, 솟구쳐 오르는 힘이 있기에 우리는 매일 새롭게 아침을 맞는다.

〈솟구쳐 오르기〉 연작시들을 통해 시인은 "활활 타오르는 상처의 꽃에서 훨훨 날아가는 새의 날개의 푸드득 솟구쳐 오름"(시집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의 자서)을 찾아 어둡고 지리멸렬한 일상의 삶 위로 튀어 오른다.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창을 장대로 삼아 장대 높이뛰기를 하듯 하늘 위로 솟구쳐 오르고(〈솟구쳐 오르기1〉), 상처의 힘을 깨닫기 위해 긴 머리에 성냥불을 당기고 싶어하고(〈솟구쳐 오르기3〉), 상처의 혼(魂), 아니 혼 속에 간직한 상처의 오케스트라에서 터져 나오는 황금 별들의 찬란한 음악을 듣기(〈솟구쳐 오르기10〉)도 한다. 상처를 비상의 날개로 삼아 날아 오르고자 한다. 그는 '시인은 천형을 앓는 무당'과 같은 존재라고 쓴 적이 있다. 무당이 고통의 칼날 위에서 춤추는 자라면, 상처의 작두를 타고 상처의 작두 위에서 공중부양을 하는 이가 시인일 것이다. 그 역시 고정희, 최승자, 김혜순과 더불어 1970년대 여성시의 새로운 솟구침을 주도한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시 쓰기 외에도 에세이, 평론, 장·단편 소설, 동화, 논문, 번역 등 분출하는 글쓰기를 펼쳐 보이고 있다.

이 시에서도 상처에 내재한 자기갱생 및 자기정화의 힘을 노래하고 있다. 봄은 겨울에서 솟구쳐 오른다. 파란 싹, 파아란 보리, 개구리, 빨간 넝쿨장미, 민들레, 나뭇가지의 새 눈의 몸을 빌려 솟아오른다. 땅속이나 바위 밑에서부터, 담벼락을 타고 시멘트를 뚫고, 텅 빈 허공을 일으키며 기어오른다. 떨어져야 다시 튀어 오르는 공처럼 내내 얼어 있던 것들이, 넘어져야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처럼 내내 고통스러웠던 것들이, 당겨져야 다시 줄어드는 고무줄처럼 내내 아팠던 것들이, 오늘도 '상처의 용수철'을 타고 튕겨 오른다. 내일도 스카이콩콩을 타고 날아오른다. 아아 오오 우우~ 기지개를 켜며 솟구쳐 오르는 탄성(彈性)의 탄성(歎聲) 소리 가득한 아침이다. "쓰러졌던 바로 그 자리에서/ 바닥이여 바닥에서/ 무거운 사슬들이/ 짤랑짤랑 가벼운 빛의 음악이 되는 그날까지"(〈무거움 가벼움 솟아오름〉).

 원문출처 : [애송시 100편 - 제 82편]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청년화가 L을 위하여 함형수 문태준·시인
 원문링크 : http://issue.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14/2008041400283.html
문태준·시인
입력 : 2008.04.13 22:59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일러스트=잠산
함형수(1914~1946) 시인은 생전에 불과 17편의 시편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난해서 노동자 숙박소 등을 전전했지만 하모니카와 시 노트만은 꼭 갖고 다녔다. 한 여배우와 동거했지만 사랑에 실패하고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정신착란증에 시달리다 북에서 숨졌다. 그는 평생 한 권의 시집도 펴내지 못했지만, <해바라기의 비명> 만큼은 많은 사랑을 받았다.

《시인부락》은 서정주·김달진·김동리·오장환·김광균·함형수 등이 참여한 시 동인지였다. (《시인부락》 동인들은 '생명파'로 불렸다.) 함형수 시인은 이 시를 1936년 《시인부락》 창간호에 발표했다. 우선 이 시를 읽으면 후기 인상파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나 《해바라기》 같은 그림이 떠오른다. '압생트'라는 싸구려 술을 많이 마셔서 물체가 노랗게 보이는 황시증에 시달렸다는 빈센트 반 고흐. (고흐는 술을 마시는 이유를 "노란 높은 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정신착란증으로 권총 자살한 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도 함형수 시인의 불우한 죽음과 겹쳐 읽혀진다. 함형수 시인이 '청년화가 L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를 창작하면서 빈센트 반 고흐의 열정적인 삶과 죽음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헤아릴 수 없지만, 적어도 둘 사이에 적잖은 영향관계가 있다고 분석하는 의견은 많다.

시인은 자신의 무덤 앞에는 묘비를 세우지 말라고 말한다. '차거운' 주검 앞에 세운 '차거운' 비석은 죽음을 완성하고, 죽음을 죽음으로 붙박는 것. 마치 널이 죽은 사람의 몸을 사방으로 서늘하게 가두듯이. 대신 노랗게 출렁이는, 태양처럼 열정적으로 타오르는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고 말한다. 다함이 없는, 대해(大海)와 같은 보리밭의 생명력과 공중으로 높이 날아오르는 노고지리(종다리)의 꿈과 자유를 달라고 말한다. 노란 빛깔과 푸른 빛깔의 색채대비가 인상적인 이 시는 식민지시대의 고한(苦恨)을 넘어서면서, 몸과 사랑과 꿈의 죽음을 완강하게 거부하겠다는 시인의 의지가 시종 넘쳐난다.

"눈앞에 보이는 삶의 미미(微微)한 즐거움은 선화륜(旋火輪)과 같다"고 했다. 선화륜은 횃불 같은 것을 손에 들고 빙빙 돌릴 때 생기는 불의 둥근 원(圓)을 말한다. 그만큼 삶의 즐거움은 허망하게도 머무르지 않고 흩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삶을 지속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수미산(須彌山) 같고 큰 바다 같은 꿈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마음에 해바라기가 자라고 보리밭이 출렁이고 종다리가 날아오르게 하자. 보리밭의 너비와 종다리의 높이를 사랑하자. 함형수 시인의 이 시가 우리에게 주는 불멸의 선물은 바로 그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