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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출처 : [애송시 100편-제42편]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 황지우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25/2008022500010.html
문태준·시인
입력 : 2008.02.25 00:05 / 수정 : 2008.02.25 00:05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零下) 십삼도(十三度)

영하(零下) 이십도(二十度) 지상(地上)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起立)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零下)에서

영상(零上)으로 영상(零上) 오도(五度)

영상(零上) 십삼도(十三度) 지상(地上)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 일러스트=잠산

황지우(56) 시인의 시 '손을 씻는다'를 함께 읽는다. "하루를 나갔다 오면/ 하루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든다/ 내심으로는 내키지 않는 그 자와도/ 흔쾌하게 악수를 했다/ 이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될 것들을/ 스스럼없이 만졌다"라고 쓴 시. 한 점 오점 없이 살 수는 없다. 저질러가면서 우리는 산다. 좌충우돌하면서 난동을 부리면서.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시대가 진화해가는 것은 우리가 내부적으로 가진 자기 반성과 좀 더 나아지려는 희망의 추구 같은 것 때문이다.

이 시는 솔직하다. 나무는 꼭 나무를 지칭하지는 않는다. 헐벗고 무방비이고, 때로는 벌 받고, 긴가민가 하는 사람으로 읽어도 좋다.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라고 중얼중얼할 줄은 아는 사람이다. 아주 숙맥이거나 속물적이지는 않아서 현재의 환멸을 볼 줄은 아는, 앙가슴이 뛰는 그런 사람. 바깥 세상이 영하인지 영상인지 구별할 줄 알아 드디어 버틸 줄도 거부할 줄도 알게 된 사람. 마침내 싹도 잎도 틔우면서 불쑥 기립하여 봄의 나무가 된 사람. 자력의 운동성을 가진, 스스로를 혁명하는 사람. 자기 몸을 쳐서 바다를 건너가는 새 같은 사람. 의지의 사람… 우리는 이런 봄나무를 기다리는 것 아닌가.

황지우 시인은 1980년대를 날카로운 풍자로 노래했다. 그는 1980년대의 독재와 살해와 검열에 맞선 '시의 시국사범'이었다. 한 대담에서 1980년대의 시대적 상황에 대해 "시대가 우리를 건드렸다"고 표현했는데, 그의 시는 권력의 중증(重症)을 처절하게 해체하려한 양심이었다. 설령 그가 시 '뼈아픈 후회'에서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폐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라고 써 지나온 삶의 궤적을 돌아보고 있지만, 이 혹독한 자기 검열의 고백이 황지우 시의 미덕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시대와의 불화와 선적(禪的)인 기개를 넘나드는 그의 시는 한국시사에서 푸릇푸릇한 '방풍(防風)의 대밭'이다.


 원문출처 : [애송시 100편-제41편]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번째는 전화기 - 박상순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22/2008022201391.html
정끝별·시인
입력 : 2008.02.22 23:36

첫번째는 나

2는 자동차

3은 늑대, 4는 잠수함

5는 악어, 6은 나무, 7은 돌고래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열번째는 전화기

첫번째의 내가

열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2는 자동차, 3은 늑대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마지막은 전화기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번째는 나

열번째는 전화기


<1993년> 

▲ 일러스트=권신아
말문이 트인 아이는 어느 날 선언한다. "엄마, 오늘부터 엄마는 아지, 아빠는 끼리, 언니는 콩콩이, 나는 밍밍이야, 이제 그렇게 불러야 돼, 꼭." 또 어느 날은 이렇게 선언한다. "오늘부터 식탁은 구름, 의자는 나무, 밥은 흙, 반찬은 소라라고 해야 돼, 알았지?" 난감, 황당 그 자체일 때가 많은 박상순(46) 시인의 시는 이런 네 살배기 놀이의 사유로 들여다보았을 때 쉽게 이해되곤 한다. 그러니 주의하시라! 그의 시를 향해, 이게 무슨 말이지 하고 묻는 순간 당신은 헛방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니.

'A는 B'라는 반복으로 이루어진 시다. A와 B의 관계는 무연하고 또 우연하다. 인과관계가 없는 '관계 맺기' 혹은 '이름 바꾸기' 놀이다. 그러니 왜 첫 번째가 나이고 6이 나무이고 7이 돌고래인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독자들도 A에 혹은 B에 마음껏 다른 단어를 넣어 읽어도 무방하다. 또한, 이 시는 앞에는 숫자가, 뒤에는 낱말이 새겨진 아이들의 카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6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나무라고 씌어 있고, 7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돌고래라고 씌어 있다. 십진법에 따르면 세상 혹은 세상의 모든 숫자는 1부터 10까지의 숫자로 환원된다. 현실과 언어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숫자와 낱말의 관계도 무연하고 우연한 약속에 불과하다면, 세상의 모든 관계도 그러하다는 것일까?

이 시의 핵심은, '내'가 이 순서와 관계를 (외우듯) 반복하는 그 리듬에 있다. '자, 아무 생각 말고 따라 해 봐'라는 식의 폭력적인 우리의 교육 현실 혹은 성장 과정을 암시하는 것일까?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 내지는 언어(혹은 제도)의 감옥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일까? 아니면 유년의 로망이 담긴 단어의 나열이라는 점에서 상실한 본향에 대한 향수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무것이면서 아무것이 아니기도 할 것이다. 언뜻 보면 천진난만한데 읽다 보면 슬쩍 공포스러워지는 까닭들이다.

박상순 시인은 회화를 전공한 미술학도다. 유능한 북(표지)디자이너이자 편집자이며 출판인이기도 하다. '무서운 아이들'의 유희적 상상력, 신경증적 반복, 파격적 시 형식, 의미의 비약적 해체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시에 대해 다 알려고 하지 말자. 다 알려고 하면 박상순 시는 없다. 박상순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많을지 모르지만 그 누구도 박상순처럼 시를 쓰지는 못한다. 그게 중요하다.

 원문출처 : [애송시 100편-제40편] 박꽃 - 신대철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22/2008022200080.html
문태준·시인
입력 : 2008.02.22 01:01 / 수정 : 2008.02.22 01:02

박꽃이 하얗게 필 동안

밤은 세 걸음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



벌떼 같은 사람은 잠 들고

침을 감춘 채

뜬소문도 잠 들고

담비들은 제 집으로

돌아와 있다



박꽃이 핀다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린다


<1977년> 

▲ 일러스트 잠산
꽃의 개화를 본 적이 있으신지. 그 잎잎의 열어젖힘을 본 적이 있으신지.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서 최고의 일을 씨앗이 움트는 일이라고 했다지만, 꽃의 '열린 앉음새'라 불러도 좋을 꽃의 개화는 사람을 압도한다. 대개 꽃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핀다.

천천히 진행되는 개화 파노라마를 관심있게 시종 지켜볼 만큼 여유롭고 섬세한 마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아마도 많지 않겠지만.

이 시에서 사람을 '벌떼 같은 사람'이라고 비유한 부분은 압권이다. 정신없이 분주하고 시끌시끌 작당(作黨)하여 몰려다니며 입으로 바늘 같은 독설을 내뱉는 세간의 사람들을 잉잉거리는 벌떼 무리에 비유했다. 인간의 시간이 깊은 잠에 빠져들고 소란이 뚝 그쳤을 때 자연의 시간은 도래한다. 그리고 오, 하얀 박꽃은 피어난다. 물소리는 물소리로 들린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들린다.

자연의 시간에는 살기(殺氣)가 없다. 자연의 시간은 인간의 세계를 맑게 회복시킨다. 씻어낸다. 시 '무인도'에서 "인간을 만나고 온 바다,/ 물거품 버릴 데를 찾아 무인도(無人島)로 가고 있다"라고 했을 때의 무인도처럼. 하산(下山)한 당신도 '죄(罪) 짓지 않고' 어슬렁어슬렁 자연의 시간에 살고 싶지 않으신지.

이 시는 '산(山)의 시인'이라고 불러도 좋을 신대철(63) 시인의 첫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에 실려 있다. 신대철 시인은 1977년 첫 시집을 출간하고 23년간 절필을 했다. 2000년 시작 활동을 재개한 후 근년에는 알래스카, 시베리아 평원, 바이칼호, 몽골, 두만강 등 원시적이고 광활한 자연에 대한 시들을 발표하고 있다. 그곳에 정착하게 된 사람들의 이산의 역사와 고통을 부각시키면서. 신대철 시인은 북파 공작원 부대의 학군장교로 군복무를 했고, 그 당시의 기억을 토대로 전쟁과 남북 분단의 아픈 현대사를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충청도 청양의 깊은 산에서 화전민으로 살았던 그만의 체험은 붉은 혈액이 되어 신대철 시의 몸을 움직인다. 그의 시는 큰 산이요 큰 숲이다. 더 깊숙이 평화롭고, 깨금이 떨어지고, 아그배가 떨어지는 그런 곳. 당신도 가서 살고 싶지 않으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