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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출처 : [애송시 100편-제30편] 사라진 손바닥 - 나희덕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09/2008020900420.html
문태준·시인
입력 : 2008.02.09 22:51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창(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2004년> 

▲ 일러스트 잠산
이별이 이별의 사건으로만 완성된다면 사람에겐 애초부터 마음이라는 게 없었을 것이다. 이별 뒤에 오는 축축한 망각의 시간이 훨씬 고통스럽다. 서서히 잊어가며 다시 시간을 거슬러 돌아가 축음기처럼 생생하게 이별 이전의 일까지를 재생시키는 모든 과정을 아울러 우리는 이별이라는 사건의 전모(全貌)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잊는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생명 없는 사물처럼 안색 없이 돌아서기만 하면 될 것이다. 생명 없는 사물의 안색으로 헤어진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을 겪을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큰 사랑은 사랑이 소멸하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 꽃 이후의 꽃다발 혹은 열매 이후의 열매처럼 쇠잔하게 말라가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어떤 것이 바로 사랑 아니겠는가.

무안의 회산 백련지를 찾아가 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연꽃이 만개한 그 시간을 찾아가겠지만. 시인은 연못이 폐선처럼 가라앉는 시간에 거기를 찾아간 모양이다. 흰 연꽃도, 푸른 손바닥 같은 연잎도, 따뜻한 한 공기의 밥 같은 연밥도 없는 시간. 시인은 뒤늦게 그 연못을 찾아간 모양이다. 마치 애별리고(愛別離苦)를 겪고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간 사람처럼. 그 연못에서 시인은 연밥과 연잎과 연꽃의 시간을 다시 살려낸다. 우리의 습관인 순차적인 짐작과는 다른 방식으로.

누군가의 말대로 나희덕(43) 시인은 '울음의 감별사'이다. 그녀는 한 산문에서 마른 석류를 들여다본 일에 대해 쓴 적이 있다. 붉은 석류가 마르면서 바람 빠진 공처럼 물렁물렁해지고 거기서 작은 벌레들이 기어나오는 것을 보면서 "삶이란 완벽한 진공포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오히려 안도했다"라고 적었다. 세상의 통증 하나하나와 만날 때 투덜대고, 서운해하며 토라지고, 대놓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그녀의 시편들은 시원시원하게 정직해서 비옥하다. 그녀는 복숭아나무 같은 시인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을 펼쳐놓는 복숭아나무. 복숭아나무가 그토록 눈이 부신 나무임을 처음 알게 해준, 복숭아나무와 친족인 시인.

 원문출처 : [애송시 100편-제29편] 성탄제 - 김종길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05/2008020501371.html
정끝별·시인
입력 : 2008.02.05 21:53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히 잦아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설어운 설흔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 일러스트 권신아

김종길(81) 시인의 '성탄제'를 읽는 일은 내게 유년의 흑백 사진을 보는 일처럼 애틋하고 살가운 일이다. 겨울밤, 열에 시달리며 칭얼대던 어린 내게 아버지의 코트 자락은 서늘했다. 겉옷을 벗으신 아버지는 물에 만 밥 한 숟갈 위에 찢은 김치를 씻어 올려놓으시고는 아, 아, 하셨다. 하얀 가루약도 그렇게 먹이셨다. 어머니가 방을 치우고 이부자리를 펴는 사이 오래오래 나를 업고 계셨다.

산수유 열매는 고열에 약효가 있다. 열에 시달리는 어린것을 위해 산수유 열매를 찾아 눈 덮인 산을 헤매셨을 아버지의 발걸음은 얼마나 초조했을까. 할머니가 어머니의 부재를 대신하고 있으니 아버지 속은 얼마나 더 애련했을까. 흰 눈을 헤치고 따오신 산수유 열매는 혹한을 견디느라 또 얼마나 안으로 말려 있었을까. 눈 속의 붉은 산수유 열매는, 바알간 숯불과 혈액과 더불어 성탄일의 빨간 포인세티아를 떠올리게 한다. 아버지가 찾아 헤매셨던, 탄생과 축복과 생명과 거룩을 염원하는 빛깔이다. 생을 치유할 수 있는 약(藥)의 이미지다.

김종길 시인은 명망있는 유학자 집안의 후예다. 한학과 한시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가 선택한 것은 영문학이었다. 우리나라에 영미시와 시론, 특히 이미지즘을 소개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 유가적 전통과 이미지즘이 어우러진 그의 시는 명징한 이미지, 절제된 표현, 선명한 주제 의식을 그 특징으로 삼고 있다. 이를 일컬어 '점잖음의 미학'이라 했던가.

차가운 산수유 열매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이 어린것의 열을 내리게 했을 것이다. 특히 산수유, 서느런, 성탄제, 숯불, 설어운 설흔 살의 'ㅅ' 음이 서늘한 청량제 역할을 한다. 그 서늘한 청량제 속 따스한 혈맥이 우리네 가족애일 것이다. 그 따스함은,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는 그의 시 '설날 아침에'에서도 만날 수 있다.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마음으로 설날 아침을 맞이하자. 매운 추위 속에서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맞이하자. 그 한가운데 가족이 있음을 기억하자.


 원문출처 : [애송시 100편-제28편]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 오탁번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05/2008020500079.html
문태준·시인
입력 : 2008.02.05 00:45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 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 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 앉아

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후략)


<1967년>

▲ 일러스트=잠산
겨울 서정시의 대표격인 이 시는 평론가 이숭원씨의 표현대로 '찬란한 시간의 금비늘'이 반짝반짝한다.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는 섬세한 감각이나,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같은 투명한 언어감각을 보라. 시인은 다른 행인들처럼 나뭇가지에 내린 눈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의 묘미는 자연 현상인 눈의 적설을 생명의 큰 순환으로 읽어낸 데 있다. 눈이 쌓인 원시림이 석탄이 되고, 탄부의 손에 의해 채탄이 되고, 이층방 스토브의 꽃불이 되고, 하늘로 올라가는 기운이 되고, 다시 숲으로 내려앉는 눈이 되는 그 시간의 돌고 돎-둥근 궤적을 시인은 읽어내고 있다. 이 '돌아옴'의 발견이 이 시를 빼어나게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우주의 모든 존재가 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세계는 얼마나 신비롭고, 얼마나 기특하고, 얼마나 황홀하겠는가.

오탁번(65) 시인은 1966년에 동화 당선, 1967년에 시 당선, 1969년에 소설 당선이라는 신춘문예 3관왕의 화려한 등단 이력을 갖고 있다(김은자 시인을 아내로 둔 시인 커플로도 유명한데, 김은자 시인도 신춘문예 2관왕 출신이다). 이 시는 그의 시 데뷔작이다. 너무 가난해서 고등학교 3학년 2학기를 다니지 못했는데 담임선생님이 졸업장을 우편으로 보내주었다는 일화를 나는 언젠가 들었다. 대학에서 시 창작 수업을 진행하는 방식도 독특했다. 가끔은 밤새 쓴 시를 칠판에 적어놓고 학생들로부터 터놓고 평가를 받기도 했다. 나도 시 창작 수업을 들었는데 기말시험에 '학교에 자목련나무가 몇 그루인가'를 묻는 문제가 있었을 정도였다.

요즘 오탁번 시인은 고향으로 내려가 살고 있다. 그의 고향은 충북 제천시 백운면으로 천둥산과 박달재 사이에 있는 조그만 마을. 폐교된 모교를 사들여 '원서헌'이라는 문학관을 차렸다. 그곳서 그는 시골 아이들에게 시를 읽히는 훈장님이다. 그곳서 그는 우리가 잊어버린 토박이 우리말을 되살려내는 시를 쓰고 있다. "산 속에 큰 항아리를 하나 묻고 그 속에 들어앉아 글을 쓰고 싶다"는 그는 "아기를 낳는 산모의 지독한 아픔과 숨찬 기쁨이 바로 시"라고 말하는 순은의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