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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信] 아이돌과 아이들

2019. 1. 18. 21:43 | Posted by 랑세

오랜만에 동창을 만났습니다. 어쩌다 연락이 돼서 도심에 있는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마땅히 커피숍이나 음심점을 몰라서 그냥 광장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사람들 참 많더군요. 오고 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다 보니 약속시간이 좀 지났습니다. 이거 늦나 보군 하며 여기저기 살펴보는데 좀 낯이 익은 얼굴이 보이기에 가까이 가서 보니 바로 그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는 저쪽에서 나는 이쪽에서 서 있었기 때문에 못 찾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꼭 그래서만 은 아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서로 옛 모습만 기억하고 찾고 있었으니 몰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 넌 아이돌 같다 전혀 몰라보겠는걸?"

순간 친구의 얼굴이 기분 나빠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더니 빈정거리는 투로

"그래? 나는 아이들 같은지 몰라도 너는 노인네 같다." 한다.

아차 싶었습니다. 이 친구가 '아이돌'이란 말을 '아이들'이란 말로 들은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설명을 해 줬습니다.

"어이 내 말은 아이들 같다는 것이 아니라 아이돌 같다는 말이야. 아이돌이란 요즘 인기 있는 연예인으로서 젊은 아이들의 우상 같은 사람을 말하는 말이야. 네가 옷도 산뜻하게 잘 입었고 얼굴도 주름살 하나 없이 깨끗한 게 너무 몸 관리를 잘해서 좋은 뜻으로 한 말이라고." 했으나 그래도 미심쩍은 듯 얼굴 표정이 밝지를 않았다.

듣기 좋은 소리라고 해서 또는 농담이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상대의 격에 맞는 말이라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대 말이 나온 김에 요즘 아이돌은 젊은이들의 우상으로서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인기에 버금가는 옷 차람에 행동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지요. 가끔 TV를 보다 보면 옷차림이 시스루라고 속옷이 비치는 옷을 입고 나오는 경우도 보이곤 하더군요. 나는 잠옷을 입고 나온 줄 알았다니까요.

예전에 코미디언 한 분이 오래전 무대에 설 때에 대해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야외에서 행사가 있어서 참석했다가 방송에 맞춰서 겨우 도착을 했는데 아무래도 복장이 정장 차람이 아닌 간편 복장이었답니다. 그때는 요즘처럼 녹화가 거의 없고 생방송이 많았다지요. 그래서 바로 무대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원로 선배 중에 한 분이 오시더니 복장이 그게 뭐냐고 무대에 나갈 때는 관중을 존중하고 예의를 지키고 더 나가서는 자기 자신의 체신도 지켜야 하는 것이야. 어서 빨리 옷을 갈아입으라고 호통을 치시더란다. 그래서 의상 담당자에게 부탁해서 겨우 정장을 갖추고서 무대에 설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처럼 만인 앞에 설 때는 갖춰야 할 기본 예의는 스스로 지켜야 하는 것이겠죠.

요즘에야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고리타분한 훈계라고 치부해버리고 말겠지만 그래도 그런 호통을 쳐줄 수 있는 원로나 선배나 어르신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17信] 아름다운 글쓰기

2019. 1. 17. 20:45 | Posted by 랑세

한 떼 젊은 시절, 신춘문예에 열병처럼 빠졌든 기억이 새롭습니다. 연말이면 각 일간지의 신춘문예 당선작 발표를 찾아보면서 부러움과 도전해보고픈 꿈을 꾸는 열병, 청춘의 열병이었지요. 많은 젊은이들이 신춘문예에 한 번쯤은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지 않았을까요? 지금은 먼 나라 이웃 나라의 이야기가 되었지만 말이죠.

그런대 아직도 꿈은 살아 있답니다. 신춘문예는 이미 거리가 먼 이야기가 되었지만 글쓰기에 대한 열정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지요. 얼마 전에 류시화 시인의 글을 읽었습니다. 참 대한 하더군요. 그분의 글, 그리고 그분의 정신의 깊이, 한없이 끌려들어 가는 그분의 마력, 어쩌겠어요. 감탄만 연신하다가 말아야 할까요? 여기 한 부분만 이야기해 볼까요? 한번 보세요. 우리나라 말의 놀라움을 시인이 써 내려가는 능력을, 시인이란 언어, 단어의 마술 사라지만 이런 정도일 줄은 생각 못 했어요. 우리나라 말 중에 아름답다는 말의 어미와 조사의 변화에 따른 단어들의 열거를 보세요.

"아름답다, 아름답고, 아름다운, 아름다울, 아름다움, 아름답게, 아름답던, 아름답기, 아름답지, 아름다워, 아름다우며, 아름다우니, 아름다우면, 아름다운데, 아름다워서, 아름답기로, 아름답기에, 아름답기에는, 아름답기는, 아름답지는, 아름다울래, 아름답지만, 아름답길래, 아름답거늘, 아름답네, 아름답다네, 아름답단다, 아름답대, 아름다우니까, 아름다우므로, 아름다운들, 아름답다는, 아름답다고, 아름답더라도, 아름다워라......

이 얼마나 놀라운 언어인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갸륵하기까지 하지 않은가. 갸륵함이 없다면 어떻게 이토록 정교하게 마음을 표현하겠는가. '아름답다'라는 단어 하나의 어미변화만으로도 영혼이 부자가 될 수 있다니! 어디 그뿐인가. 아름다울까, 아름답겠지, 아름답겠지만, 아름다우려는, 아름다우려고, 아름답기는커녕, 아름다울수록, 아름답기조차, 아름답기까지, 아름다울지언정, 아름다울지라도, 아름다움까지, 아름다움조차, 아름다움마저, 아름다움이라니, 아름다움이라도, 아름다움만이라도, 아름다움일지라도, 아름답기를, 아름답다니, 아름답도다…... 이 중에 당신이 모르는 단어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류시화 시인의 '한 가지 아름다움만'으로도 중에서

나는 이 글을 읽고 나서 종이를 한 장 펼쳐놓고 나름대로 다시 써 보았습니다. 아! 고작 대여섯 개 쓸 정도였어요. 그러니 시인은 저렇게 많은 단어를 써 내려가는데 나는 고작 대여섯 개라니. 역시 나는 글쓰기에는 재능이 없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글쓰기는 천부적 재능이나 영감적 능력이 있어야만 하는구나 하고 나 자신에 대해 실망했습니다. 그런대 시인의 글 중에 또 이런 말이 있더군요.

『톰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말했다."나 자신이 글 쓰는 데 소질이 없음을 발견하는 데 15년이 걸렸다. 하지만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계속 써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때 이미 나는 유명 작가가 되어 있었으니까."    -류시화 시인의 '나의 글쓰기 중에서.

역시 글쓰기는 재능과 영적 능력보다도 계속적으로 지속적으로 글을 쓰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의미더라고요. 에이! 시인께서 글을 써보려는 일반인들에게 힘을 북돋아주기 위해서 하는 말이겠지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수긍 가기도 해요.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아무리 재능이 있고 영적으로 갖췄다고 해도 지속적인 노력, 계속적인 글쓰기가 한 층 더 필요하다는 이야기 아니겠어요?

열심히 노력하면, 한가지 일에 뜻을 두고 노력하면 글솜씨가 좀 더 조금씩 나아지겠지요. 뜻을 가지고 계속 한 길을 가도록 해야겠어요. 당신의 응원도 부탁합니다.


[16信] 정신적 '멈추기'

2019. 1. 16. 20:48 | Posted by 랑세

사람의 마음은 참 알 수 없습니다.

'내 마음 나도 몰라'처럼 정말 알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은 한시도 가만있지를 않습니다. 우리 손주 아이만 봐도 그렇습니다. 잘 놀다가도 '아이 심심해'하고는 또 다른 놀 거리를 찾습니다. 그마저도 또 싫증이 나면 '할머니같이 놀자!'하고 칭얼거립니다. 가만히 놀고 있는 것을 보면 무언가 그리기도 하다가 블록을 가지고 만들기도 하다가 책을 끌어안고 열심히 읽고 있다가 어느 틈에 로봇을 꺼내들고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놀고 있습니다.

바로 마음이 그렇습니다. 한시도 가만있지를 않아요. 무슨 걱정이 그리도 많은지 이런 걱정 저런 걱정, 이미 지나가서 잊을만한 일을 다시 생각하면서 후회하고 또 후회하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 일을 괜스레 걱정합니다. 내일은 추우면 어떻게 하지? 뭘 입지? 그러다가 당신 생각도 합니다. 괜스레 미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두 번 다시 안 볼 것처럼 미운 마음이다가도 갑자기 당신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 하고는 당신이 없으면 어떻게 먹고살지? 빨래는? 설거지는? 등등. 그러다가 지금 집으로 갈까? 아니 더 산책을 할까? 이리저리 생각은 쉼 없이 흘러갑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조용히 흘러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이 어느 틈엔가 그런 저런 생각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흔적도 없습니다.

아! 그 많은 생각들 쉼 없이 꼬리를 이어가면 생겼다 사라지는 생각들. 미국의 명상가로 존경받고 있는 존 카밧진이 '마음챙김명상'에서 말하길 신체가 극심한 운동으로 피곤해지면 쉬어야 하는 것처럼 정신도 잠시 '멈춤기'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단 15분, 10분, 5분이라도 잠시 자신의 호흡에 집중함으로써 생각을 멈추고 정신을 쉬게 하면 우리의 영혼이 맑고 깨끗하게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그 많은 생각들을 잠시 잠재우고 생각을 '멈추기'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정신적 건강을 위해서 말입니다.


' 사진을 찍으려면 1000번을 찍어라'

정호승 시인의 산문집을 읽다가 눈에 확 띄는 글귀가 있었습니다. 1000번씩이나  찍으라고? 정호승 시인이 성철 스님이 살아계실 때 인터뷰하기 위해서 해인사로 찾아뵈었을 때 어렵사리 얻은 인터뷰 기회에 스님께 세상 사람들을 위해 한 말씀을 해주시길 청했답니다.  말씀을 듣고 있는 동안 동행한 사진 기자가 열심히 사진을 찍어 대니까 스님께서 뭔 사진을 그리 많이 찍느냐고 하시더랍니다.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많이 찍어야 한다고 말씀드리니까 '그럼 1000번을 찍어라' 하시더란다.

시인은 그 당시 그 말씀의 뜻을 헤아릴 수 없었지만 인생의 화두로 삼으면서 잊지 않고 생각하다가 어느 날 문득 그 말씀이 '무슨 일을 하든 최선을 다해 노력해라'라는 뜻임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1000번을 노력하면 안 되는 일 없겠지요? 어떤 일을 하다가 실패를 하더라도 1000번을 시도한다면 그 일에 성공하지 않을까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을 남긴 발명왕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기까지도 그렇게 수많은 실패를 겪은 후 성공했다고 하지요?

만약 어떤 누구를 미워하고 있다면 마음속으로 그냥 나는 저 사람을 좋아해'하고 1000번을 읊조린다면 그래도 미워할 수 있을까요? 만약 어떤 글을 1000번을 쓰고 고치면 좀 더 다듬어지지 않을까요?

정호승 시인도 그 글에 쓰기를 '시를 쓰려면 1000번을 써라' 그리고 또 '누굴 사랑하려면 1000번을 사랑해라'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되었든 하루 한 번씩 한다고 하면 1000번이 되기 위해서는 1000일을 해야 하고 그러면 약 3년 정도가 걸릴 터인데 그렇게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있을까요?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늘도 감동해서 일이 성사되도록 돕지 않을까요?

1000번을 노력해 보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어떤 일이든 시작해 봐야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내 마음속에 깊숙이 감춰진 것을 꺼내도 좋고 아니면 가장 가까이 자리한 일들, 담배를 끊는 다든가 그동안 연락 없던 친구를 만나본다거나 하는 등, 그리고 '당신에게'라는 이 글을 1000信 이상이 되도록 써보도록 한다든가.

아무튼 무엇인가 당신과 살아가는 동안을 글로서 써보고 싶은 마음을 이어가도록 노력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14信] 싫은 사람들

2019. 1. 14. 20:54 | Posted by 랑세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지요.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순환 속에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요.

그런 만남 속에서 친구가 생기고 선배도 생기고 후배도 생기지요. 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만남 중에 애인도 있고요. 그렇게 평생을 지내다 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곁을 스쳐지나 가고 또 만나고 하게 됩니다.

옛말에 '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라는 말이 있지요. 하지만 좋은 인연도 있고 좋지 않은 인연도 있는 것 같아요. ' 나는 저 사람 참 싫어!' 하는 경우가 왕왕 있거든요. 참 싫은 사람 그런 사람들 중에  위선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선자들이란 국어사전을 보면 ' 겉으로만 착한 체하는 사람'이라고 나와있더군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주변에 이런 사람들 있지요. 자기는 깨끗하고 정직한 체하지만 부패와 부정축재를 일삼는 사람들, 신사인척하면서 온갖 스캔들을 뿌리는 사람, 겉으로는 정직한 납세자인 척하면서 알바 생들을 괴롭히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사람들, 약한 사람들을 돕겠다고 봉사하는 사람인 양 소리가 요란한 사람이 알고 보니 오히려 약자를 이용하고 학대했던 사람들 등 참으로 우리 주변에서 없어져야 할 그런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몰염치한 사람들과 더불어 가장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평범한 사람들 중에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 등 매일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람들 중에 평소에는 살갑고 친밀하고 서로 허심탄회하게 말을 주고받는 그런 사람들이 뒤돌아서 서는 험담하고 욕하고 속이고 거짓을 말하곤 하는 그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나는 위선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없는 사회였으면 하지만 없을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나는 어떤 때 만화 영화의 주인공처럼 '정의의 사도" 가 되어 그런 사람들을 응징하는 꿈을 꿔보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그런 사람들과도 어울려 지내는 수밖에요. 다만 아주 소극적인 방법이지만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같이 어울리지 않는 것이지요. 그쪽에서 나를 못살게 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좋겠지요. 아니면 내가 먼저 그쪽을 알아보지 못했다면 나중에라도 알게 된 순간에 그때부터라도 같이 어울리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요?


당신은 혼자 있는 것이 싫은 가요?

당신은 사교성이 좋으니까 이런 사람 저런 사람들 만나는 걸 좋아하지요. 그렇다고 해서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혼자라서 좋은 점들도 있답니다.

나는 요즘 열심히 걷기 운동을 합니다. 딱히 운동이라면 운동이겠지만 운동이라기 보다 시간이 나면 걸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대 혼자라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이리저리 걸을 수 있는데 옆에 누구라도 있다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게 됩니다. 어쩌다 갈림길이 나오면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결정해야 한다거나 또는 조용한 숲길로 향하고 싶은데 자꾸 저잣거리 쪽으로 가자고 할 때처럼 의견이 엇갈리는 경우가 생기게 되거든요. 그냥 상대를 무시하고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겠지요? 그러니 걷는 것도 혼자일 때가 편하고 좋지 않을까요?

그리고 어쩌다 여럿이 모여 있을 때 식사를 하기 위해서 음식점을 결정하는 문제도 많이들 부딪치게 되지요. 혼자라면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는 정도로 가볍게 먹을 것도 여럿이면 서로의 취향과 식성을 생각해 줘야 하니까 당연히 결정하는데 시간이 걸리기도 하지요.

또 여럿이 모여있으면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나로서는 별로 할 말도 없기도 하지만 대화 내용에 거의 아는 바가 없을 경우에 참 난감합니다. 같이 어울릴 수도 없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갈 수도 없을 때 그럴 때 혼자 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혼자라는 것은 자유입니다. 사람들은 외롭다 또는 고독하다고 말들 합니다. 외롭다는 것은 상대적이지만 고독은 절대적이라지요. 많은 사람과 소통하고 관계를 하는 입장에서 혼자라는 것은 외로움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혼자라는 것이 원초적 의미로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그리고 인생 마지막 순간조차도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것. 그것이 고독이라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간혹 생각해 봅니다. 사람은 간혹 혼자 있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말이지요. 물과 기름처럼 많은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 겉도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는 더없이 혼자 있음이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혼자 있는 연습을 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외로움을 덜 느끼고 원초적인 고독도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당신은 아마 좋은 생각이라고 하지 않겠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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