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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전볍륜경>에서는

고통의 성스러운 진리를

철저히 이해하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고통을 극복하려 하거나

변화시키려 하거나

더 나은 것으로 만들려 하거나

도피하려 하지 말고

이해해야 한다.

*

힘겨운 때야말고

늘 달아나는 식의

쉬운 방관을 택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고통과 직면하고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기에

더 없이 좋은 기회다.

*

사람들은 고통이나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나름의 탈출구를 갖고 있다.

환상 속에 빠져 지내기, 영화보기,

인터넷 서핑, 책 읽기, 친구들과 수다 떨기,

차나 커피 마시기, 무작정 걷기 등.

그럴 때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빠져나오려 하는 것일까.

우리는 무엇을 얻기 위해

그런 환상들에 빠져드는 것일까.

상황이 별로 좋지 않거나

만족스럽지 않다는 문제에 대한

우리의 습관적인 반응은 이런 식으로 나온다.

*

봇다는 우리가 일상에서

어딘가로 간절히 가고 싶어할 때,

절 같은 데로 가고 싶어할 때,

혹은 지혜롭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할 때,

우리가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

고통을 참구하다 보면

우리 모두가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깨달은 여승들의 게송 모음長老尼偈 >에는

유명한 끼사고따미 비구니(여승)의

이야기가 나온다.

끔찍하게 사랑했던 어린 아들을 잃고

비탄에 빠진 끼사고따미를

사람들이 도우려 할 때

붓다가 택한 전략은

다른 사람들도 역시 죽는다는

자명한 사실을

그녀에게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아들의 죽음은

우주에서 단 하나뿐인 사건이 아니라

다른 모든 죽음과

밀밀히 연관된 사건이라는 사실을

붓다는

끼사고까미가 죽음이라는 고통을

이해하기를 바랐다.

*

죽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존재 구조의 일부다.

죽음은 도처에 가득 차 있다.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

그래서 붓다는 끼사고까미에게

아들을 되살려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말고

그 문제의 보편성을

이해하라고 가르쳤다.

*

우리는 실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반길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상이 이러하니 그냥 놓아버리라고?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반응이 아니다.

*

우리가 고통의 문제,

우리가 처한 현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제대로 이해할 때 나올 수 있는

단 하나의 자연스러운 반응은

무엇이 오든 피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염오다.

*

염오는 관여하지 않음을 뜻한다.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을

외면해 버려야 한다.

현상을 변화시키려 하는 것은

우리를 삶 속에 더 깊이

휘말려들게 할 뿐이다.

현상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삶 속에 휩쓸려들게 할 뿐이다.

*

관여하지 않는 것이 올바를 반응이다.

관여하지 않음은

존재나 현상을 가만 내버려두고

그것들에 관심을 갖지도 않고

염려하지도 않음을 뜻한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있을 뿐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것에

관여하지 않는다.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것에

관여하지 않을 때

우리는 삶으로부터 물러선다.

그것은 삶을 거부하는 것과 거의 비슷하다.

존재와 현상을 사라지게 만드는

일종의 거부나 무시 같은 것.

*

붓다는 안타가운 마음에서

사람들을 해산시키거나

물러가게 하는 법을 터득했다.

*

가끔 사람들은 딱히 더 좋은 할 일이 없어

다른 이들과의 이야기 속에 빠져들곤 한다.

나는 빈둥거리고 지내는 것을,

특히 안거(수행자들의 은둔수행기간)에 들었을 때

여러 시간 질문에 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는

담마(Dhamma.붓다의 가르침. 진리)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다.

그런 답은 생각을 자꾸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고요히 앉아 생각하기를 그치는 데서 나온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내게 질문을 던지면

나는 가급적 간략하게 답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수다 떠는 일에

빠져들지 않도록 한다.

*우리는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사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어째서 그런 온갖 잡사에 관여하는가.

그것들을 바로 보라.

그것들이 당신에게 고통을 안겨주기만

할 뿐임을 깨달으라.

그것들은 당신을

피곤하고 산란하게 만들 뿐이다.

염오의 자세로 볼 때

이 모든 지각 대상은 하찮은 것이 되어버린다.

[아잔 브람 명상론1] 내 일이 아냐

2019. 11. 25. 18:28 | Posted by 랑세

*

삶을 깊이 관조하다보면

삶이 자신의 통제권에서

철저히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당신의 통제권에서 벗어나 있는 것들은

당신이 관여할 일이 전혀 아니다.

내가 명상할 때 흔히 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하라고 권하는

아주 근사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

당신이 절에서나 다른 어디에서

무엇을 체험하든 이렇게 말하라.

"내 일이 아냐!"

물 공급 상황에,

오가는 사람들에게,

내가 제공받는 음식에,

날씨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말하라.

"그건 내 일이 아냐!"

*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하는 말이나 행동을

염려하는 것은 당신이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일이요,

그들의 업이요,

당신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아잔 브람 명상론1] 썩은 사과

2019. 11. 24. 22:20 | Posted by 랑세

*

고통을 주시하는 것은

참된 수행의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고통을 다스리려 하지 않고

그 원인을 탐구하려고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수행에서 중요한 대목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고통을 겪을 때

그것으로부터 달아나려 하거나

다른 것으로 바꾸려 하는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기계가 고장 났다고 기계를 나무란다.

기계는 본래 고장 나는 것이 정상이다.

세상사는 뜻한 대로 흘러가지 않고

그 때문에 우리는 괴로워한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가짐을 바꿔

세상과 싸우는 짓을 그쳐야 한다.

*

우리가 세상과 싸우기를 그치고

고통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

우리 내면에서는 또 다른 반응이 일어난다.

닙비다. 곧 염오(厭惡;역겨움)라는 반응이.

염오는 몸과 마음과 세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서 저절로 우러나온다.

*

당신이 불법의 본질을 이해했다고 하자.

당신이 절을 세우거나

가정을 갖는 일의 본질을,

하나의 집단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일의 본질을

이해했닥 하자.

당신은 그런 것들이

자기 뜻대로 굴러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것을 알고 있다.

당신은 지혜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문제들로부터 도피하려 들거나

문제들을 다른 것들로 바꾸려는 짓을 그친다.

*

당신은 문제들이 윤회라는 구조 속에

본래부터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붓다로 하여금 첫 가르침인

<초전법류경>을 펴게 한

위대한 통찰이 바로 이것이다.

*

고통이 윤회의 구조 속에 본래부터

내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통찰할 때

당신의 반응은 변한다.

그것은 당신이 썩은 사과를 받고 나서

썩지 않은 부분을 먹기 위해

썩은 부분을 도려내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당신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사과 전체가 썩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럴 때 당신에게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은 염오다.

*

사과 전체에 대한 거부감이나 혐오감이나

그것을 외면하거나

그냥 내던져버리는 식의 반응이 염오다.

자신이 사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

*

우리는 고통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고통과 불만이 절대적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고통과 불만을

우리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으며

적당히 가려내 바로잡을 수도 없다.

이런 점을 깊이 관찰해 이해할 때

그것은 수행하고자 하는

계기나 동기가 될 수 있다.

*

붓다는

사람들이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보고

깊은 충격을 받아

고통의 해결책을 찾아 나섰다.

붓다는

자신도 역시 늙고 병들어 죽을 것이며

그런 현실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통찰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붓다는

그런 문제들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을 찾아 나섰다.

*

늘고 병들고 죽는 문제는

우리가 본래 타고난 것들이다.

앞으로 우리에게는

그런 일들이 닥쳐올 것이다.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늙고 병들고 죽을 것이다.

그런 현실은 누구도 어찌할 수 없다.

우리 삶, 우리 몸,

그리고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사물은

하나같이 다

이 엄연한 사실과 직면하고 있다.

*

이 세상 모든 것은

늙거나 낡고 무너지고 죽는다.

모든 것은 나빠지거나 망가진다.

붓다는 지혜로운 이였기에

자신이 온잦 영적인 능력을 키우고

덕성을 쌓았는데도

결국은 그런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뭔가 다른 응답이 필요했다.

고통을 철저히 이해하는 것이.

 

[아잔 브람 명상론1] 큰 그림

2019. 11. 23. 17:19 | Posted by 랑세

*

당신이 절에 살든, 도시에 살든,

혹은 가로수가 늘어 있는 조용한 거리에 살든,

다른 어디에 살든

때로 문제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삶이라는 게 본래 그렇다.

 

*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때

" 의사 선생님

제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병이 났습니다."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 제게 정상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병이 났습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사람의 몸은 때로 병이 나는 게 정상이다.

우리 몸의 정화시스템은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부패한 것들을 밖으로 퍼내는 것이 정상이다.

온수기도 가끔 한 번씩 고장 나는 것이

정상이다.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이 삶의 속성이다.

 

*

우리는

삶이 우리 자신이나 다른 이들을 위해

매끄럽게 흘러가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실제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고통이라는 말이 지닌

깊은 속뜻을 늘 명심하라.

고통은

세상이 결코 당신에게 줄 수 없는 것을

달라고 요구하는 데서 온다는 것을.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절대로 받을 수 없는 것을

받을 것이라 기대하고 요구한다.

 

*

우리는

완벽한 가정, 완벽한 일자리를 요구한다.

우리는 자신이 세우려 하거나

마련하려 애쓴 모든 것이

알맞은 시간과 장소에서

완벽하게 굴러가기를 바란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주어질 수 없는 것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의

깊은 명상과 깨달음을 바란다.

하지만 이 우주는 그런 식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당신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면,

고통을 자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

일을 할 때든 명상을 할 때든

가끔 일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할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어야 한다.

세상이 당신에게 줄 수 없는 것을

달라고 하지 말고

그대로 관찰하라.

 

*

이 세상을 자기 마음에 들게 만들기 위해

다그치거나 밀어붙이려 하지 말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놓아버려라.

자신의 몸과 마음과 가족과 세상과 싸울수록

부수적인 여러 가지 문제만 자꾸 불러일으켜

당신은 더 많은 괴로움을 겪게 된다.

 

*

이따금 우리가 나날의 삶에서 뒤로 물러나

그것을 깊이 이해할 때

우리는 큰 그림을 본다.

우리가 속한 절에, 우리 자신에게, 우리 삶에

잘못된 것이나 좋지 않은 게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좋지 않게 흘러가는 것이 바로

세상의 속성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붓다가 말한 고통이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가

뜻하는 바는 이것이다.

 

*

당신은

자신의 삶이

제대로 굴러가게 하기 위해,

가정과 몸과 마음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하기 위해

일하고 싸운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은

결국 뜻대로 되지 않거나 어그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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