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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잔 브람 명상론1] 아잔 브람 소개

2019. 11. 22. 17:32 | Posted by 랑세

 

저자 아잔 브람(Ajahn Brahmavamso Mahathera)은 파란 눈의 세계적인 명상 스승.

스님이 된 케임브리지대 물리학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태국의 고승 아잔 차의 수제자.

호주에 남반구 최초의 사찰을 세운 호주 불교의 개척자.

전 세계 불교계는 물론 대중을 감화시킨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의 저자. 아잔 브람은 동양인도 불교신자도 아니었다.

1951년 영국 런던의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기독교 학교에 다니며 성가대에서 활동하던 그는 열일곱 되던 해 우연히 불교서적을 읽다가 자신이 불교도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불가에 귀의할 정도의 각성은 아니었다.

10대에 아버지의 임종을 보며 죽음이라는 것이 그런 것임을 깨닫고 마음의 동요 없이 아버지를 가만히 내려놓을 수 있었다.

당시 죽음에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보았다는 것을 큰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케임브리지대 장학생으로 물리학을 전공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던 어느 날, 그는 현대 물리학만으로는 자신을 둘러싼 사물과 인간, 그리고 세상과 삶의 이치를 설명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적어도 그는 폭탄 만드는 일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기를 바랐다.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도 그는 풀리지 않는 삶의 궁금증으로 고뇌했다.

그런 상태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 그는 태국으로 건너가 삭발하고 수행승이 되었다.

태국의 ‘살아 있는 붓다’로 불리는 아잔 차(Ajahn Chah Bodhinyana Mahathera)를 만나게 된 것은 그의 인생에 커다란 전기가 되었다.

동료 수행승이 아잔 차가 이끄는 숲 속 수행자들의 사찰인 왓농파퐁에 가서 사흘만 함께 지내보자고 했다.

사흘은 아홉 해가 되었다.

아잔 차와 함께 명상하며 가르침을 받은 그는 호주로 떠났다.

적도 아래(남반구) 인류 최초의 불교사찰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직접 벽돌을 쌓고 용접봉을 잡으면서 그는 일생을 노동자로 살다간 아버지를 연민했다.

그리고 한 가지 깨달음.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일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 일을 ‘하기 싫어하는 마음’ 때문임을.

그런 깨달음을 얻으며 완성한 사찰이 바로 호주불교의 산실이자 수행승의 최대 커뮤니티가 된 보디니야나(Bodhinyana) 수도원이다.

이곳의 선원장인 아잔 자가로(Ajahn Jagaro)가 1994년 안식년 휴가를 떠나고 1년 후 본의 아니게 아잔 브람이 선원장이 되었다.

아픈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과 감옥에 있는 사람과 불교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가 오랜 명상으로 터득한 ‘생각을 사라지게 하는’ 마음훈련법은 호주를 넘어 전세계로 전파되었다.

불교라는 동양 종교의 경건함을 견지하면서 서양인 특유의 유머러스한 언변으로 부드럽고 편안하게 법문을 가르치는 사이 그는 전세계에서 가장 존경 받는 명상 승려가 되었다.

각국으로부터 강연 요청이 끊이지 않았고 2002년에는 국제불교정상회담의 명법사가 되기도 했다.

그의 법문과 명상수행 지도는 산이나 사찰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물리학도 출신의 서양인 승려답게 그는 정보기술을 활용해 대중과 접속한다.

미국의 유명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인 스티븐 배철러(Stephen Batchelor)와 함께 스카이프를 통해 듀크대 학생들에게 법문을 전하고 있다.

매주 금요일 사찰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그의 법문동영상은 전 세계에서 매년 수백만 명이 접속해 들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그가 서방 불교 수도승을 위해 영문으로 편집한 불교 입문 가이드 《승려의 길》은 서방의 수많은 불교 입문자의 수행 지침서가 되었다.

아잔 차가 세상을 떠난 후 아잔 브람은 아잔 차의 제자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수행승으로 꼽히고 있다.

2004년에는 호주 커틴대로부터 최고 영예인 존 커틴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30년 동안 수행하며 쌓은 경험과 스승 아잔 차와 함께 보낸 에피소드와 고대 경전에 실린 이야기와 절에서 행한 법문 등을 모아 펴낸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를 비롯해 명상 안내서 《마음챙김, 기쁨, 그 너머》 등 의 저서가 있다.

아잔 브람은 계속 사라지고 있고 그의 법문을 듣는 사람들은 계속 행복해지고 있다.

동남아시아 싱가포르와 태국 일주 크루즈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은 설레임입니다.

설렘을 안고 떠난 동남아 크루즈.

언제나 설렘으로 시작해서

설렘으로 끝나는 여행.

싱가포르 창이 공항에 도착.

아이비스 호텔에 짐을 풀다

싱가포르 ibis style hotel

우리나라의 서울보다 조금 클까 말까 한 정도의 싱가포르.

여기저기 아파트와 고층 건물이 눈에 띈다.

아이비스 호텔에서 내려다 본 싱가포르 시가지

거리는 생각보다 넓었지만

단독 주택이나 저층 주택들은

깨끗한 상태는 아니었고

비교적 깨끗한 편이었다.

싱가포르 대로 옆에 있는 불교 사원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불교 사원들이 인상적이었다.


[36] 허황된 이야기

2019. 2. 9. 00:24 | Posted by 랑세

여러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다. 개중에는 듣다가 지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는 슬그머니 일어나서 나왔다가 뜸을 들인 다음에 들어가면 지루한 이야기는 지나갔거나 거의 끝물이거나 그렇다. 그러면 좀 덜 지치기도 하고 말하는 사람 기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피할 수가 있다. 그런대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좀 듣다 보니 너무 허황한 이야기 같아서 막 지치려는 찰나에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전개가 되기에 끝까지 듣게 되어 여기에 옮겨 보려고 한다. 그가 이야기한 것을 그냥 기억나는 대로 옮겨보려고 하지만 조금 각색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기억력에 한계라고 이해해 주면 좋겠다.

"내가 사는 곳은 서울의 구 도심권이라기보다는 강남 쪽으로서 요즘에야 중심지라고 할 수도 있는 곳이다. 집 앞에는 주차장이 있어서 남한 어느 지역이든지 갈 수 있도록 차가 준비되어 있다. 호남선과 경부선 영동선 등 고속버스가 즐비하게 기다리고 있어서 언제든지 탈 수가 있다. 그뿐인가. 서울부터 인근 수도권 어디든지 갈 수 있도록 차량 한 대당 수억 원씩 하는 지하철이 3개 노선이나 지나가고 있다. 나는 언제든지 그 넓은 주차장과 승차장을 내 맘대로 이용할 수 있다. 물론 한 밤중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의무실이 있다. 대형 대학병원이 내 의무실이다. 거기는 만약 내가 아프면 뛰어서 갈 정도의 거리에 있으니 긴급 시 걱정이 없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 수위실이다. 대 검찰청이 뒤쪽에서 내 집을 경호하고 있으며 그 옆에서는 대법원이 내 가정을 지켜주고 있다. 그리고 내 서재로서 대형 도서관이 있다. 그 서재에는 언제나 내가 필요한 책을 필요한 때에 꺼내 볼 수 있다. 그뿐인가. 내 집 뒤쪽에는 큰 정원이 있다. 그 정원은 크기가 미국의 센트럴 파크만큼은 아니지만 내가 한번 끝까지 왕복을 하려면 적어도 한 시간 반 정도 이상이 걸린다. 사시사철 아름다운 꽃과 나무가 우거지고 산새들도 지저귀고 산토끼가 뛰어노는 곳이다. 멀리 산을 찾아서 가지 않아도 운동 삼아 산책 삼아 나는 이 정원을 거닌다."

여기까지 듣다가 막 일어서려는 순간 들리는 말이 나를 다시 자리에 앉게 했다. 그냥 자기 자랑이려니 했더니 꼭 그렇지마는 아닌 듯해서이다.

"이렇게 좋은 곳이니 더 이상 나무랄 데가 없겠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렇게들 생각하나요? 정말 편하고 안전하고 쾌락하니 무엇을 더 바라겠어요? 그런대 그렇지가 않아요. 무언가가 허전합니다. 무엇인가가 없어요. 그게 뭐겠어요. 꾸미지 않은 자연이 없어요. 조용히 흐르는 냇가, 무어라고 말이 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랜 세월을 견딘 느티나무 같은 마음을 보듬어 주는 위안거리가 없어요. 떠다니는 구름은 같은 하늘을 노닐지만 구름이 보내주는 정감 어린 그늘이 없어요. 전원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요!"

결국엔 쓸쓸한 얼굴 모습이다. 처음엔 자랑인 듯하더니 그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더 듣다 보니 원래 서울 태생이라 마땅히 갈 고향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아니 서울에서만 산 사람이 전원생활이 그립다고요? 에이 그냥 그리워하시고 마시구려. 아예 시골로 가서 살 생각일랑 마시구려."

했더니 이 사람 화를 벌컥 내면서 왜 그러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시골에서 살다가 서울로 올라왔는데 시골에서의 전원생활을 꿈꾸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내려간 지 10년 만에 다시 올라왔쑤다. 전원생활이란 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니랍니다. 우선 가려고 하는 곳에 연고가 있던가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시골이라고 해서 예전과 달리 텃세라는 것이 있어요. 그걸 헤쳐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 힘이 있어야 해요. 혼자서 텃밭이라도 가꿀 힘이 있어야 해요. 셋째 자신이 있는 취미 생활이 있어야 해요. 남들은 열심히 농사짓고 이런저런 일을 하는데 혼자 빈둥빈둥 놀 수는 없지요. 그러니 취미든 혹은 특기든 뭐라도 있어야 시간도 보내고 혹은 동네 사람들과 어울릴 수도 있지요. 이런 준비가 없이 무작정 전원생활하겠다고 갔다가는 나처럼 서울로 다시 돌아와야 할걸요? 서울로 다시 올려고 해도 쉽지 않았어요. 우선 시골집 처분이 마음대로 안되고 또 막상 처분이 된다 해도 그 돈으로 전에 살던 집만큼은 살 수도 없단 말입니다. 겨우겨우 마련해서 서울로 오긴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막급입니다."

나는 몇 마디 더할까 하다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사람은 그냥 하늘만 쳐다보면서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듯했지만 나도 더 이상 그 사람의 꿈을 깨뜨리기 싫어서 그냥 일어고 말았다.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을는지 몰라도 그때는 그 사람의 생각이 변함이 없는지 어떨는지는 좀 궁금은 했지만 더 이상 마음에 담아 두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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