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48건
- 2013.08.13 까방권과 악플 방지권
- 2013.08.11 이웃집 새댁이 저녁 무렵에
- 2012.02.11 주변 사람들 이야기 1
- 2012.02.02 눈을 치우며
- 2012.01.31 神과 人間 : 왜 사는가 보다 어떻게 사는가에 대하여.
- 2011.01.03 우리는 스스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향기로운 나무들 이라는 모임을 자주 갖는다.
모두 6명인데 그 중에 최인영이란 친구가 있다. 호는 청목이라고 부른다.
그런대 이 사람이 무라카미 하루키 친구인 안자이 미즈마루라는 사람과 비슷하다.
안자이 미즈마루는 화가이지만 이 친구는 목공예가 이다.
청목은 사람 좋고 또한 통이 큰 사람이다.
미즈마루는 하루키와 간혹 술친구가 되기도 하지만 하루키한테 그림도 선사해주고 그런 친구인데 청목은 나한테 목공예 작품 한 점 준적은 없다는 것을 빼곤 거의 비슷하다.
청목이 통이 크다는 건 직장 동료들이 2차인지 3차인지는 말을 안 해서 잘 모르겠지만 술을 진탕마시고 그들을 데리고 야밤에 집으로 몰려가서 또 술을 진탕으로 마시고 목조각 작품들을 전부 집어 가져갔다는데 서도 알 수 있듯이 뼈를 깎는 각고 끝에 완성한 작품들을 집어 가도 가만있을 정도라면 보통 통이 큰 사람은 아니다. 나한테는 한점도 안 주었지만 말이다.
더구나 그날 집에 있던 그동안 잘 모셔 두었던 양주들을 하나 둘 꺼내다가 몽땅 거덜을 내도록 마셔댔다하니 참 통이 큰 사람이다. 나한테는 양주 한 모금도 준적 없지만 말이다
나도 한번 청목 부인을 뵌 적이 있는데 매우 품위가 있고 점잖은 분이신데 통이 큰 청목 때문에 아마 곤욕(?)을 치루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야밤에 친구들을 몰고 다니는 사람들은 그 부인이 고생한다는 일반적인 말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청목을 이야기 할 때 절대 나쁘게 이야기 하거나 험담을 할 수 없다. 내가 만약 사람 좋은 사람을 험담을 한다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될 터이니 절대 나쁘게 이야기 할 수 없다.
우리는 간혹 만나서 당구도 치고 막걸리도 마시곤 한다. 당구 실력도 용호상박이라고 할까 서로 엇비슷하다. 내가 한번 이기면 그 친구가 또 이기기도 하고 그러지만 사실 내가 쪼금 높다. 당구 게임이라는 것이 보통 진 사람이 게임비를 내는 거니까 내가 몇 번 연속으로 지게 되면 좀 약이 오르는게 정상이다. 그래서 어이 이제는 당구수를 좀 올리는게 어때? 하면 표정에 변함이 없이 쓸데없는 소리 하면서 올리겠다 안올리겠다 없이 그냥 가만히 있는걸 봐도 참 통이 큰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는 술 실력도 비슷하다. 막걸리로 말 할 것 같으면 요즘 시쳇말로 각 일병으로 끝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기분이 좀 좋으면 한 병 더 하는 것도 비슷하다. 그 정도지 지나칠 정도로 마시거나 그 친구 직장 동료들 데리고 야밤에 집으로 몰려가는 행태 같은 건 우리 둘이는 없었다. 그러니 한 사람만 데리고 가는 것보다 여러 명일 때만 데리고 가는걸 봐도 참 통이 큰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한번은 막걸리를 마시는데 내 핸드폰이 건전지가 바닥이 나서 충전 표시가 깜박거리기에 어 이거 큰일인데 건전지가 다 되었네 하니까 그는 내 핸드폰을 들고 나가서 근처 편의점에 가서 충전해달라고 맡기고 왔다. 참 그러고 보니까 사람 좋기만 한게 아니고 친절하기도 하다. 그러면서 천원이래……. 그런다 그래서 뭐 천원? 그러면 이따 찾으러 갈 때 줄께. 하고는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썰을 풀다 보니까 잠깐 없어졌다 했더니 잠시 후 돌아와서는 자 핸드폰 찾아왔어 그러면서 내 주기에 아니 천원 가지고 가지 그랬더니 쓸데없는 소리 그러고 만다. 그러니 얼마나 통이 큰가 하는걸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날 술값은 내가 냈다.
그런대 이 친구가 취구를 잘 친다. 취구란 무어냐 하면 술한잔 걸치고 치는 당구인데 나는 술한잔 걸치게 되면 자세가 흐트러져서 게임을 잘 못하는데 이 친구는 맨 정신일 때 보다 더 잘 친다. 그뿐이 아니다. 보통 취구를 치면 자기가 이기게 되는데 그러면 자기가 이기고도 게임 비를 자기가 낸다. 그러니 얼마나 통이 큰 친구인가.
절대 좋은 사람을, 통이 큰 사람을 나쁘게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이런 것이다. 하지만 그 친구가 이 글을 읽는 다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다. 뒤가 캥기기는 하지만 뭐 통이 큰 사람이라 아무 소리도 없이 그냥 지날 갈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마 쓸데없는 소리 할 지도 모르고 어찌했든 다음 만날 날이 기다려진다. 만나면 즐거우니까…….
눈이 내리면 시인은 시를 생각하고 젊은 청춘은 낭만에 젖는다.
꼭 그렇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지.
하지만 눈이 와서 쌓이면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나처럼……
길에 쌓인 눈을 치워야 하니까.
겨울 막바지에 입춘도 얼마 남지 않은 날 눈이 내렸다.
나무 위에 지붕 위에 길 위에 눈이 쌓였다.
눈
윤동주
지난밤에
눈이 소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 주는 이불인가 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내리지
나무 위에 지붕 위에 내린 눈은 치우지 않아도 언젠가는 녹아 내리겠지만 길 위에 쌓인 눈은 곧바로 치우지 않으면 그래서 얼어붙으면 곤란해진다.
요즘은 집 앞 눈은 치우지 않으면 법으로 책임을 묻게 되어 있다지만 그래서 보다 우선 내 차가 움직이는데 지장이 있기 때문에 치우지 않을 수 없다.
집 앞 도로는 경사가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치우지 않아 얼어 붙기라도 한다면 차가 올라가지 못 할 경우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눈을 치우는 일은 힘든 일이다.
이번에도 3시간 정도를 치우고서야 끝낼 수 있었다.
그런대 4~5cm 쌓인 눈을 치우다 보면 그 밑에는 전혀 습기라고는 찾아 볼 수 었게 포근히 덮어 놓았던 솜털을 걷어낸 듯 뽀송뽀송하다.
눈을 치우며 시를 떠올리다 보니 덜 힘든 듯 끝냈다.
누구는 내리는 눈을 보고 시를 생각 하지만
나는 눈을 치우며 시를 느껴본다.
눈 위에 쓴 시
류시화
누구는 종이 위에 시를 쓰고
누구는 사람 가슴에 시를 쓰고
누구는 자취없는 허공에 대고 시를 쓴다지만
나는 십이월의 눈 위에 시를 쓴다
눈이 녹아 버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의 시
“요즘 뭐 볼만한 영화 없어?”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겨울 하늘은 차갑게 파랬다.
이제 설날도 지났고 낼 모레면 입춘이고 방에만 있기에는 이 시골구석이 슬슬 갑갑해지는 겨울의 막바지이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영화제목 하나가 눈에 띈다.
“神과 人間”
“이거 어떨까?” 당연히 아내는 제목에서 풍기는 뉴앙스를 느끼고는 “어 괜찮겠는데 좋아요”
그래서 본 영화다.
알제리 산골 마을의 수도원, 그리고 평수사인 의사 뤽을 포함해서 7명의 프랑스인 수도사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수도원 하면 고풍스럽고 중세적인 분위기를 떠올리기 쉽지만 이 영화는 시대적으로 현대의 시대 상황이다.
1996년에 발생한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 한 것으로 어찌 보면 다큐멘터리를 보는가? 하는 정도로 사실적이다.
수도사들은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율법에 따라 한곳에 정착하여 기도와 독서, 자급자족을 위한 노동 등을 실천하며 이슬람을 믿는 마을 사람들과 평화롭게 산다.
영화가 시작되면서부터 장면 장면에 몰입하게 하는 수도사들의 경건한 걸음걸이, 기도하고 묵상하고 독서하는 자세 하나하나에서 그리고 때마다 울려 퍼지는 그레고리안 성가와 수도원의 분위기들.
그런 반복적 일상에 약간 지루함을 느낄 만 할 때 서서히 무장한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이 등장하면서 긴박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그런 와중에서도 사랑이 무어냐고 묻는 마을처녀의 질문에 다정하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해주는 의사인 뤽의 모습이 참으로 평화스럽게 보인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알제리 정부군과의 정치적 소용돌이가 드디어는 수도사들에게 생명의 위협으로 다가오고 수도원을 떠나라는 알제리 정부군의 통보와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의 수도원 침범으로 점점 위기는 고조되면서 절은 수도원장 크리스티앙은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고뇌하며 神을 향해 기도하며 응답을 갈구하면서 몸부림치지만 응답은 없고…..
삶과 죽음(수도원에 남느냐 떠나느냐) 사이에서 수도사들의 고뇌와 번민이 그레고리안 성가와 함께 너무 리얼하게 다가왔다.
의사 뤽은 나이도 많고 평생 의사로서의 직분상 죽음의 길(남는 다는 것)을 선택하면서 “나는 자유인이야.”라 하고 다른 수도사들도 고뇌 끝에 남기로 결정 한 후 갖는 “최후의 만찬”과 같은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울려 퍼지는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가 그렇게 상황에 잘 어울리는 곡일 줄은 미쳐 몰랐다.
“아니 그 순간에 백조의 호수라니……”
“왜? 감동적이지 않았어?”
“아니 그 곡은 왈츠 춤곡 아닌가? 그 순간에 춤곡은 좀 그렇지 않아?”
내 무식이 탄로나는 순간이다. 아내는 한심하다는 듯 나를 쳐다본다.
“왈츠는 4분의 3박자이고 이건 4분의 4박자이고 발레로 자주 무대에 올려지잖아.”
헉! 이런 처참함이란. 하지만 그냥 넘어갈 순 없잖아 까칠하게 덤벼본다.
“그래? 박자를 잘 아는군. 그럼 어떤 음악을 듣고 4분의 3박자와 8분의 6박자, 그리고 4분의 2박자와 4분의 4박자인지를 구분할 수도 있겠네.”
아내는 한심하다는 듯 외면한 채 이제 막 어두워져 가는 겨울의 초저녁 서울의 거리로 눈길을 돌린다.
숭고하고 장엄하고 감동적인 영화를 본 후 공연히 분위기를 흐릴 필요는 없겠지……
왜 사는가 보다 어떻게 사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우리는 말없이 모처럼의 서울나들이 겸 영화감상 뒤풀이를 위해 그리고 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한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위하자는 나의 거창한 제의에 대해 속셈을 빤히 다 안 다하는 표정이면서도 아내는 말없이 광장 시장 안의 빈대떡과 막걸리 한잔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현안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오랫만인 사람도 있고 자주 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모 처럼 만나는 자리임에는 틀림이 없었지요.
서로 살다 보면 시골이라도 그렇게 자주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랍니다.
사회라는 의미가 인간의 집단적 생활을 일컫는 다는데 사람이 모이면
형셩되는게 사회가 아닌가요?
사람 사는 사회에는 끝임없이 일이 생긴답니다.
크고 작은일 좋은일 나쁜일 서로 주고 받을일 빼앗을일 등등....
그래서 같은 단지안에 모여 살더라도 서로의 이해관계로 모였다 헤어졌다를 반복하게 되더군요.
거기에는 누가 잘했고 못했고 그런 문제를 떠나서
이런 저런 말들이 많게 마련이더군요.
그렇다고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보고 뭐라고 한다는 속담처럼
미주알 고주알 따지고 들 수 없다는게 이런 시골 사는 사람들의 어려움이더군요.
모임에 다녀오고 나면 생각나는게 있어요.
좀 우리도 스스로 변화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요.
서로서로가 서로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나보다는 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고 이해하고
모임에서는 나보다 공통의 관심사를 토론하고 이야기하고
좀더 나은 방향을 모색해보는 그런 모임말이죠...
이제 우리도 못살고 어리석고 남을 짓밟아야 내가 사는 그런 시대는 아니지 않나요?
우리 개개인이 변화되면 가정이 변화되고 마을이 변화되고 사회가 변화되고
더나가서는 국가가 세계가 변화는 거 아닐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나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먼저 변화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오늘이었습니다.